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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03. 2024

세군도 까미노 데 산띠아고 꼰 마드레

Day 0. 파리 → 생장 피드 포르

숙소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까지 따라 나온 막내 동생과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인사를 했다. 테제베를 타러 몽파르나스역을 향해 길을 나선 엄마와 나를 동생이 배웅을 해 준 참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옆에 있는 엄마를 의식하며 간신히 참아냈다. 막내와 나 사이에 누군가를 챙기는 일은 나의 몫으로 기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동생에게도 그 무게가 실려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밑에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동생과 투닥거리며 자란 나는 늘 그 존재를 삐딱하게 바라보곤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일을 하러 간 엄마 없이 큰 동생과 둘이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동생을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나는 친구들과 놀러 나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친구에게 생일 파티를 초대받은 어느 날이었다. 누나와 놀고 싶다며 뒤 쫓아오는 동생이 나를 따라잡을까 싶어 잰걸음으로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닐 때마다 동생을 달고 나오는 건 나뿐이라는 점이 몹시 부끄러웠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은 사정까지 모두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편하지 않은 감정의 원인을 동생에게 뒤집어 씌우기로 했다.


"다른 친구들 동생은 귀여운데 너는 그렇지 않아. 그래서 같이 놀기 싫어."


자꾸만 거리를 좁혀 오는 동생을 밀어내기 위해 생각해 낸 아홉 살 어린이의 잔꾀는 이 정도 수준이었다. 네가 귀엽지 않다고 쏘아붙이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엽지 않은 동생을 따돌리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래 사이에서도 꽤 키가 큰 편이었던 나는 힘껏 달려 동생을 따돌릴 수도 있었지만 막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그럽지 못한 누나이면서 동시에 모질지 못한 누나였던 모양이다. 결국 이번에도 동생을 달고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눌러야 했다.


내가 열한 살이 되던 해, 내 오랜 소원을 이뤄준 존재가 나타났다. 막내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막내 동생은 정말 작고 귀여웠다. 엄마가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나는 곧잘 막내를 잘 돌보곤 했다. 여태 큰 동생을 외면했던 이유가 정말 '귀여움'에 있었던 것처럼.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물의 온도를 적당히 맞춰서 몸을 씻기고, 젖병을 잡을 힘이 생길 때까지 물렸으며, 보드랍게 마른 옷을 입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매번 큰 동생을 돌볼 때면 속 시끄럽게 화를 내던 내 안의 나도 막내 동생 앞에서는 조용했다. 나도 학교 끝나면 누군가 데리러 왔으면 좋겠어, 나도 숙제할 때 누군가 살펴 봐줬으면 좋겠어, 나도 밥을 먹을 때 누군가 입가를 닦아줬으면 좋겠어, 나도 마음껏 뛰어놀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 나를 향해 씩 웃어줬으면 좋겠어……. 돌림 노래처럼 끊이질 않고 들리던 목소리가 이제 더는 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엄마의 주문에 응당 고분고분 움직이는 바람직한 누나가 되어 있었다.




막내 동생이 엄마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 벅차게 떠오를 때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몽파르나스 역에서 타야 할 테제베의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고, 엄마가 마실 아침 커피를 챙기고, 우리의 배낭을 내리기 쉬운 곳에 실어 올렸다. 


좌석 번호를 찾아 자리에 앉고서 베드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베드로는 잭과 함께 지난 첫 번째 까미노에서 만난 친구이다. 내가 생장 피드 포르로 넘어가는 날을 기억하고 있던 베드로가 나의 두 번째 까미노를 응원해 주기 위해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철저히 혼자서 시작해야 했던 지난 첫 번째 까미노와 사뭇 다른 생장 피드 포르 행이었다. 막내 동생의 배웅과 베드로에게 격려 덕분에 마음이 허전하지 않았다. 옆에는 이번 길의 동행인 엄마도 있으니까. 더군다나 지난번과 다르게 여름이다. 그때는 겨울이었던 터라 괜히 더 쓸쓸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파랗고 들은 푸른 날, 우리는 파리에서 바욘으로 다시 바욘에서 생장 피드 포르로 향했다.


바욘으로 가는 테제베 안에서




생장 피드 포르의 순례자 사무소

산띠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이 시작되는 생장 피드 포르. 이곳에 있는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자 등록을 하는 것이 순례의 첫 번째 절차이다.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막 순례자 등록을 마친 일본인 어느 순례자들이 밖으로 나오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생김새가 비슷하다 보니 자신들처럼 일본에서 온 건가 싶어 말을 건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며 나는 오랜만에 길 위의 인사말을 그들에게 건넸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직역하자면 '좋은 길'이라는 스페인어로 순례길 위에서 만나는 순례자에게 좋은 여정이 되길 바란다는 의미로 건네는 인사말이다.)


내가 건넨 인사에 잠시 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이내 곧 '부엔 까미노!'라는 화답이 돌아왔다. 오직 이 길에서만 통용되는 순례자들의 언어에 반가움이 그들의 얼굴에 비쳤다.


얼마 후, 우리의 차례가 됐다. 순례자 여권인 끄레덴시알(Credencial)을 만들고 순례자 표식인 가리비도 각자의 배낭에 달았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Camino de Santiago, 산띠아고의 길이라는 스페인어)는 말 그대로 산띠아고 성인을 기리는 그리스도교의 순례길이다. 별이 비추는 곳 아래 산띠아고 성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향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고 있다. 성인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당시 그의 무덤이 가리비로 뒤덮여 있었다는 일화로 인해 그의 상징으로 가리비가 사용되고 있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표식이 가리비가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미 지난 까미노에서 배낭에 달고 다닌 가리비를 챙겨 왔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이번 순례를 기념해 하나를 더 달기로 했다. 배낭을 메고 순례자 사무소에서 알베르게(Albergue, 'Hostel'에 해당하는 '숙소'의 스페인어)까지 짧은 거리를 걸으며 두 개의 가리비가 서로 부딪혀 나는 소리에 숨겨지지 않는 뿌듯함이 들었다.


배낭에 달아 둔 가리비




여름의 생장 피드 포르


12년 전 생장 피드 포르에 도착해 정처 없이 마을을 걸어 다녔던 때를 기억한다. 노을이 지는 초저녁의 하늘에 달이 걸려 있던 시간이었다. 낯선 마을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이 마을이 그저 '좋다'라고 되뇌며 거리를 걸었다.


"엄마, 나 보고 싶은 풍경이 있어."


이제 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을 구경을 하러 나온 참이었다. '아마 이 즈음 어딘가 일거야.' 하며 온갖 불확실한 의미의 단어로 이뤄진 말들을 나열하며 엄마의 손을 이끌고 마을 한 편에 자리한 언덕으로 향했다.


여름인데도 그날의 날씨가 생생히 떠오른 것은 아마 바람 때문이었을 거다. 바람은 마을을 뒤덮고 있던 구름을 몰아내 놓고선 다시 구름을 잔뜩 몰고 왔다. 눈이 부시게 날이 따듯하다가도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엉클어트리는 공기는 기분 좋게 선선했다. 나는 머리를 쓸어내리며 익숙함에 마음을 앉혀보았다. 겨우 하룻밤을 머물렀을 뿐이고 무려 12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계절도 사뭇 다른 때임에도 나는 이곳을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풍경을. 세월은 훌쩍 지났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생장 피드 포르의 모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웠던 풍경의 생장 피드 포르 (좌) 2012년 12월, (우) 2024년 6월



Day 0. JUN 9, 2024

Paris to St. Jean Pied de 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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