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서울 → 파리
"엄마, 우리 그 아몬드 가져갈까 봐."
맞춰둔 알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방바닥에서 자다가 이제 막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옮겨 온 엄마를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배낭이 무겁다며 마지막까지 고심하다가 결국 냉장고로 직행한 아몬드를 가져가자고 말을 바꾸는 내게 엄마는 이유를 물었다.
"생각해 보니, 가져가서 간식거리로 한 주먹씩 먹으면 좋을 거 같아서."
"여자들은 이렇다니까!"
엄마는 새벽의 무거운 공기를 비집고 웃으며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공항으로 출발 전, 엄마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계획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지금처럼 건강한 몸으로 안전하게 다녀오기를, 더불어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했다.
나는 약 12년 전, 지금과 같은 여정으로 떠났던 순례자의 길에서 마주한 물음 앞에 다시 선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빠드레(Padre, '아버지'의 스페인어)라고 부르는 독일인 순례자 잭은 종종 내게 이렇게 묻곤 했다.
"미셸, 지금 행복하니?"
미셸은 그 당시 내가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는 친구들에게 알려준 내 영어 이름이다. 미셸이라는 이름이 은영이라는 한국 이름보다 꼭 내 것처럼 편안했던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영이라는 이름이 내 이름 같지 않아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뜻 나오지 않았던 때였다. 그런 이유로 길 위에서 만난 모두가 미셸이라고 나를 불렀다.
이상한 건 행복하냐며 묻는 잭의 질문은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에 쓴 일기장을 펼치면 그 답을 알 수 있겠으나 굳이 그런 수고는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내 대답이 지금의 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파리로 가는 기내에서 나는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었다.
그녀는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중에서
자전적 글쓰기로 알려진 아니 에르노가 어머니의 생을 다룬 소설을 읽으며, 엄마가 내 옆에 있음에도 엄마가 몹시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지난밤 서울에 도착한 엄마와 마주 보며, 엄마의 얼굴을 오랜만에 들여다보았다. 엄마는 종종 내게 이런 말을 한다.
"엄마, 많이 늙었지? 꼭 시골 할매같지?"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서야 그간 떨어져 지내며 놓쳐온 엄마의 세월을 가늠해 보곤 한다.
엄마는 내가 챙겨준 노트를 펼치더니 펜을 꺼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의 다른 한 편에 앉아 있던 막내 동생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없이 등을 켜주었다. 동생의 소리 없는 배려에 작은 탄식을 뱉는 나와 달리 엄마는 밝아진 시야에 익숙해 보였다. 큰 동생과 나와는 달리 줄곧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막내 동생만이 발휘할 수 있는 섬세함이었다. 아무리 따라잡고 싶어도 흉내 낼 수 없는 막내 동생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마치 그 배려를 내가 입은 듯 고마움까지 들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파리. 이미 지친 상태였지만, 해가 저물 줄 모르는 백야는 우리를 다시 거리로 내몰았다. 숙소에서 걸으면 금방 닿을 수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했다. 엄마와 막내 동생, 엄마와 나, 이렇게 둘 씩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는 우리를 보고 어느 남자가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셋이 한 프레임에 담긴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남자와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누군가의 말에 "데 나다"(De nada, '괜찮아요'의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제야 그가 스페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번 여정에서 처음으로 받은 호의가 다름 아닌 스페인 사람에게 받은 거라니. 조만간 걸어서 스페인에 갈 거라고 그에게 다시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내게만 특별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먼저 나간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이 반가움을 혼자서만 간직하기로 말이다.
Day -4. JUN 5, 2024
Seoul to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