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수비리 → 빰쁠로나
지난밤은 무척 고요했다. 돌비 애트모스로 설계한 것인 양 5.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로 울려 퍼지던 론세스바예스의 코골이와 완벽히 대조된 밤이었다. 심지어 우리 옆 방에는 아주 심하게 코를 고는 데이비드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갑자기 코골이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역시 '문'이 있는 방의 소음 차단 효과는 확실했다. 브라이언이 우리와 같은 펜션에 예약을 성공했다고 내게 전했을 때 든 걱정이 무색했다.
엄마가 짐을 부치지 않았기에 다시 오롯이 내 배낭의 무게를 실감하는 날이었다. 겨울에 50L짜리 배낭을 메고 걸었을 때보다 확실히 크기도 무게도 덜한 짐이었지만 '아직은' 꽤 무거웠다. 내 배낭에는 두 권의 책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까미노에서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썼다. 평소에도 나는 인상 깊은 순간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 그때마다 기록을 한다.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도 함께 흩어지는 느낌이 드는 게 싫어서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의(이라고 쓰고 '상당한'이라고 읽는다.) 강박이 더해져 낳은 습관이기도 하다.
어느 날, 베드로가 알베르게의 공용 휴게실 한 편을 자리 잡고 그날 찍은 사진을 보며 일기를 쓰는 내게 다가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간 내 일기장을 그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베드로가 읽을 수 없는 일기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우리 순례의 첫날에 네가 날 도와줬던 일을 쓴 거야."
베드로는 피레네 산맥에서 미아가 될뻔한 나를 구해준 적이 있다. 이미 한참을 앞서 갔다고 생각한 베드로가 배낭도 없이 맨몸으로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알베르게에 카메라를 두고 왔다며 되찾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순례길을 얕잡아 본 탓에 당장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든 상황이었다. 평소에 등산도 하지 않는 주제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첫날부터 해발고도 1,300미터의 산을 넘고 있냐며 속으로 미련한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내 코가 석자임에도 그를 위한답시고 그거 참 안된 일이네, 하며 힘내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베드로는 내게 웃으며 말했다.
"네 배낭 나한테 줘. 저기 보이는 고지까지만 들어줄게.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알고 보니 나를 앞서 간 유럽인끼리 저 뒤쳐지는 순례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그들을 대표해 베드로가 나를 도와주러 온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날의 일을 한국에서 온 '소녀'가 피레네의 바람에 맞서 싸우고 있었지, 하며 회상하곤 한다.
정말 그랬다. 그 말처럼 바람은 몹시 불어왔고 하늘에 가득한 구름은 배낭을 멘 몸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마지막 구간에는 비까지 내려서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하산했으니 그야말로 자연과 정면승부를 본 날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만난 그들과 길 위의 동료가 되었으니 일기장에는 고난 끝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따듯한 날로 기록했다.
빰쁠로나에서 베드로의 여러 친구를 만나 길에서 밤새도록 와인을 마신 일, 스페인의 전통대로 열두 시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하나씩 입 안에 욱여넣으며 새해를 맞이했던 일, 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던 베드로가 주말마다 우리를 보러 와주고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찾아와 완주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준 것까지……. 사십일 가량 되는 여정의 중대사를, 사소하게는 그날 먹은 아침 식사, 생소한 지명, 하나 둘 새롭게 알아가는 스페인어까지 생생하게 적었다. 종이에 검은 펜으로 눌러쓴 기록은 머릿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 만든 책 『일몰을 향해 가는 길』이 되었다. 엄마 역시 이 책을 읽었고 딸을 통해 알게 된 산띠아고 순례길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보통 순례자들의 배낭을 가리켜 삶의 무게라고 말한다. 이 길을 걷기 위한 배낭을 꾸릴 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채워 넣기 때문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배낭의 무게가 적을수록 순례에 유리하다. 그렇다 보니 무게가 꽤 나가는 책 따위는 순례자 배낭에 어울리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까미노에서 베드로와 다시 만날 약속을 잡자마자 나는 배낭에 가장 먼저 내가 쓴 이 두 권의 책을 넣어두었다. 『일몰을 향해 가는 길』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베드로에게도 전해져야 할 책이었다. 한글로 쓴 책이라 베드로가 내 일기장을 볼 때처럼 읽지 못하더라도 큼지막하게 '우리'의 사진을 가득 담은 이 책은 하나의 앨범처럼 그에게 전해질 테니까.
빰쁠로나에서 베드로와 함께 묵었던 알베르게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베드로와 약속한 시간, 알베르게 현관의 벨이 울렸다. 나는 당장 문 앞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 묵을 건 아니고요, 친구가 있어서요. 잠깐 문을 열어주실 수 있나요?"
정말 베드로가 온 것이었다. 오스삐딸레로(Hospitalero,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사람을 뜻하는 스페인어)인 시사르가 그가 말한 우리의 사연에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던 베드로를 보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날 바라봤다.
한동안 그를 향한 그리움이 나만이 지닌 일방적인 감정일까 싶어 주저하기도 했다. 내 걱정과 달리 내가 까미노를 다시 걷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린 후로 베드로는 줄곧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 덕분에 더는 속을 태우지 않을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눈물이 그냥 나는 수준이 아니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 나를 보던 엄마는 내가 눈물이 다 난다,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베드로는 나를 오랫동안 안아주었다.
"미셸,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베드로는 내 머리를 가리켜 말했다. 염색을 한 긴 머리의 한국인 소녀를 떠올리는 듯했다. 당연하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우리가 열두 살 차이가 나니, 12년 만에 이곳에 온 지금의 나는 그 당시 베드로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겉모습만 달라진 줄 알아? 내가 이번에 얼마나 거뜬하게 피레네를 넘었는지 네가 봤어야 했는데!"
나는 베드로에게 책을 건넸다. 다른 한 권은 그때 베드로와 함께 까미노에 왔던 훌리아에게 전해달라고 당부를 했다. 훌리도 정말 보고 싶은 까미노 친구이지만 일이 무척 바쁜 터라 만나기 어려웠다.
베드로에게 짧은 메시지라도 적어주고 싶은 마음에 책 표지를 펼쳐 면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베드로를 생각하면 '천사'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까미노에서는 천사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랑스 길에서 가장 고된 구간으로 알려진 첫날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던 건 베드로 덕분이었다. 나는 그날 서슴없이 내 배낭을 지고 가던 베드로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바로 까미노의 천사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스스로 개의치 않아 하더라도 종이 위에 오래 남겨질 글귀는 그 표현이 정확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베드로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며 나는 스마트폰에 번역 앱을 켰다. 나는 한글로 '나의 천사 베드로에게…'로 시작하는 문장을 입력했고 번역된 스페인어를 보며 그는 말했다.
"아무렇게나 써도 돼. 네가 써주는 건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까."
베드로와 맛있는 걸 사 먹으라며 알베르게 문 앞까지 따라 나온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빰쁠로나 거리를 나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를 위해 이 길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내가 이곳을 다시 오기 위한 명분으로 엄마의 소망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내 옆에서 거리를 걷는 베드로를 보며 그 생각은 더욱 짙어졌다.
"기억나? 우리 여기서 술을 진탕 마셨던 거."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가는 나를 보며 베드로가 말했다. 그럼, 기억하고 말고. 겨울의 한가운데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와인 잔을 하나씩 들며 거리를 메우던 에스빠뇰 사이에서 술을 끊임없이 들이붓던 날을.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까미노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언제나 단골로 등장하는 내가 피레네에서 조난될 뻔한 사연과 더불어 함께 길을 걸었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며 우리는 추억에 잠겼다. 잭, 훌리아, 나초, 라이자……. 그날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늘어놓는 베드로를 보며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12년 만의 재회였다. 익숙한 거리를 오래된 친구와 나눈 날이었다.
Day 3. JUN 12, 2024
Zubiri to Pamplona, 20.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