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빰쁠로나 → 뿌엔떼 라 레이나
빰쁠로나 도심에서 빠져나와 이제 막 보도블록이 벗겨진 외곽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우리 뒤에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자동차와 자전거의 추돌사고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운전석에 있던 운전자는 곧바로 길바닥에 쓰러진 자전거 운전자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곤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그를 꼭 안아주었다.
낯선 광경이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괜찮은지 묻거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 정도로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혹은 잘못의 시비를 따지는 광경이 익숙한 내가 사는 서울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허둥대고 있는데도 진심을 다해 안아주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안도했다. 무엇보다 다친 사람의 놀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어? 뭐지… 대체 왜 또 눈물이……?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듯 막내 동생과 파리에서 헤어지던 순간부터 아니, 고흐를 다시 만나고 왔을 때부터였을까? 조금이라도 감정이 몰려오면 눈물부터 나곤 했다. 지난밤, 베드로를 붙잡고 하도 운 탓에 이미 눈이 팅팅 부어있는 터라 이 상태에서 더 우는 것은 몹시 곤란한 일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눈물을 엄마가 볼세라 황급히 닦아내고 앞서가는 엄마의 꽁무니를 쫓아갔다.
하루 종일 맑은 날이었다. 다른 계절과 두드러지는 투명한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걸음을 이어갔다. 꼭 바다 같기도 한 파란색에 마음이 시원했다. 높이 솟아난 나무의 잎이 쉴세 없이 나부끼도록 바람이 불어왔다. 덕분에 강한 햇살을 받아 등줄기에 흐르던 땀이 금세 식곤 했다.
지난밤, 베드로는 엄마가 배낭을 지고 걷지 않도록 우리의 배낭을 하나 챙겨갔다. 자신의 집에 보관을 해뒀다가 이틀 후 우리가 걸어서 도착할 에스떼야에 가져다 주기로 한 것이다. 아직 까미노에 적응 중인 엄마를 염려해 베풀어준 마음이었다. 나는 당장 필요한 이틀 분의 배낭을 멨고 엄마는 가벼운 차림으로 걸을 수 있었다.
마음도 가벼워진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렸네…'로 시작하는 〈흰 구름〉을 반복해서 부르곤 했다. 아무래도 길 위에서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이 미루나무였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봄방학을 마치고 새 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가방 가득 무겁게 새 교과서를 가지고 오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책상정리를 하곤 했다.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낙서로 가득 채운 헌 교과서를 버리고 책장에 새로 받아온 교과서를 채웠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가 버리려고 꺼내놓은 교과서 사이에서 얇은 음악 교과서를 따로 빼놓으며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평소에도 장르에 상관없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는 악보가 가지런히 있는 책을 무척 아꼈다. 음악 교과서 역시 그 범주에 속한 것이다. 엄마가 그런 부탁을 할 때에서야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펴보고 말았던 음악 교과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펼쳐 보는 빈도수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낙서가 많지 않았다. 혹은 종이만 보이면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대는 내 성정이 음악시간에 노래를 부를 때는 잠잠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엄마가 원할 때마다 펼쳐 보며 노래를 부르는데 방해가 되지 않겠다며 안심했다.
"하-늘-에서-- 굽어보면- 보리밭이 좋-아 보여-↗︎"
엄마가 부르던 노래가 바뀌었다. 우리가 걷는 풍경이 달라진 것이다. 엄마는 보리밭을 보고 이번엔 〈종달새의 하루〉를 선곡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것이 정말 보리밭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밀농사를 주로 하는 스페인이기에 아마 높은 확률로 이 밭은 밀밭일 터였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가사에서 '좋아 보여'에 무게를 두며 엄마는 노래를 했으니까.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동요 중 하나인 이 노래는 큰 동생이 수행평가 연습을 한다며 집에서 내내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엄마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걔가 얼마나 잘 불렀는지 몰라, 하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종달새가 된 것 마냥 노래하던 동생을 추억하곤 한다. 어째서인지 내 기억에는 없는 동생의 모습을 나는 본 것처럼 생생하게 알고 있다. 지금과 달리 볼이 통통한 얼굴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동생의 모습을. 엄마의 말마따나 아주 잘 불렀을 것이다. 보나 마나 '좋아 보여'의 '여'를 꺾어 올리며 불러야 하는 포인트도 아주 잘 살렸겠지.
노래를 부르며 걷다 보니 금세 뻬르돈 언덕에 닿을 수 있었다.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순례자 형상의 청동 조각상 앞에서 포즈를 바꿔가며 서는 엄마를 사진으로 여러 번 담았다. 그리고 이제 막 언덕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언덕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우리가 꼭 정말 종달새가 된 것 같아서. 배에 힘을 꼭 주고 노래를 마저 이어 불렀다.
"종-달-새가-- 쏜살같이- 내--려--옵니다↘︎"
다시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다. 알베르게에만 도착하면 온갖 인상을 지으며 침대로 들어가 꼼짝도 않는 엄마 때문이었다. 아침이면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완전히 회복된 컨디션으로 잘 걸을 수 있다고 말하는 엄마였지만, 그날의 걷기가 끝나면 180도 달라진 표정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며 침낭 안으로 들어가 지퍼를 올려버렸다.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엄마의 기분에 따라 내 마음도 크고 작게 요동쳤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입맛도 없다며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엄마를 억지로 공용 주방으로 끌고 가 빰쁠로나에서 산 라면으로 대충 끼니라도 때워야 했다.
"네 엄마가 산띠아고까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밤, 베드로는 몹시 고생하며 걷는 엄마를 염려하며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베드로는 엄마에게 근육통에 좋다며 바르는 약까지 챙겨주며 우리 모녀를 살폈다. 이 길 위에 자신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며 산띠아고를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꼭 연락하라고 베드로는 신신당부를 했다. 첫 번째 까미노를 시작할 때 피레네에서 내 배낭을 대신 짊어준 베드로가 이번에는 엄마의 배낭을 대신 짊어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도움을 받는 것이 여간 불편했는지 '부담이 된다'는 표현으로 그의 마음을 밀어냈다. 그 말에 나는 무척 속이 상한 나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내 생각을 내뱉었다. 그냥 고맙다고 말해주면 안 되냐고.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방향을 잃고 잘못된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를 거리낌 없이 도와주면서 한편으로 베드로의 호의는 거북해하고 있었다. 엄마는 끝끝내 부담스럽다며 자신의 감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도 이러니 저러니 하며 늘어놓던 실랑이를 멈췄다. 베드로는 엄마의 친구가 아니라 내 친구이니까 내가 품는 감정을 엄마에게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지난밤에 베드로에게 선물로 받은 펜던트에 손을 가져갔다. 나바라 주의 상징인 꽃 에구스끼로레(Eguzkilore, '은엉겅퀴'의 스페인어)가 새겨진 펜던트였다. 나의 힘듦을 이해하고 도와주려 애쓰며 말하던 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닿기 바랐다.
식사를 마치고 휴식 시간에 돌입한 엄마를 두고 나라도 기분 전환을 할 겸 홀로 뿌엔떼 라 레이나의 거리를 거닐었다. 그때 햇살이 내리는 벤치에 앉아 있던 던을 다시 만났다.
던을 처음 만난 건 빰쁠로나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도시로 진입하는 성벽 입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춰 선 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엄마와 나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까미노에서 처음 만나는 대도시인 빰쁠로나에 가까워지자 도심의 복잡함 때문에 앞뒤로 걷던 순례자들을 알아보기 여간 쉽지 않았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잘 걷고 있음에도 길 위에 순례자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괜히 조급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마침 발견한 던의 뒷모습에서 배낭에 달린 가리비는 내게 괜찮으니 천천히 걸어오라며 보폭을 살펴주었다.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 옆에 서서 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왠지 이 길 위에서 오랫동안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다시 만난 던은 까미노에 함께 온 아들과 장을 보러 가려던 참이었다. 나를 알아본 던이 나를 불러 세워 내게 이름을 다시 물었다.
"은영이예요."
"아무래도 메모장에 써놔야겠어. 스펠링이 어떻게 돼?"
처음으로 까미노를 찾았을 때와 달리 나는 내 이름을 '미셸'이 아닌 '은영'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만 해도 내 이름을 처음 만나는 외국인에게 미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제는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이 영 어색해졌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렵더라도 이제는 은영이라고 나를 소개하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나답게 느껴졌다. 던은 내가 불러준 은영의 스펠링인 'Eunyoung' 옆에 내가 구사하는 발음처럼 가장 비슷하게 나를 부를 수 있도록 괄호 안에 내 이름이 들리는 대로 적어두었다. 이어서 엄마의 이름을 물었고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던은 활자를 입력했다.
지난 까미노에서 유일하게 나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던 라이자가 떠올랐다. 길 위의 모든 친구들이 내게 미셸이라고 부르는데도 라이자는 은영이라고 부르며 나와 대화를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도 은영이라는 이름을 모르진 않았지만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금세 포기하고 미셸을 찾곤 했다. 그럼에도 오로지 라이자만이 언제나 나를 은영이라고 불렀다. 물론 은영의 '은'이 워낙 어려운 터라 그는 종종 나를 '언영', '운영' 혹은 '잉영'이라고 부르는 일도 잦았다. 바르지 않은 발음으로 여러 번 실수하게 되더라도 Smiling & Trying을 해보겠다며 라이자는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지난밤에 빰쁠로나 거리에서 만난 브라이언도 그랬다. 그는 까미노에서 만난 친구들이라며 제목을 달아둔 메모장을 내게 보여주며 엄마와 나의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그 역시 우리의 이름을 되도록 정확하게 부르고 싶다고 까닭을 설명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Smiling & Trying을 해보려고! 그 목록의 첫 번째로 적힌 우리의 이름을 나는 또박또박 읊어주며 그를 도왔다. 내가 라이자에게 배운 것을 브라이언이 나를 통해 배워가고 있었다.
라이자 같은 이들이 제법 많구나. 어쩌면 그때와 다르게 이런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Day 4. JUN 13, 2024
Pamplona to Puente La Reina, 23.7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