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영 Jul 12. 2020

이별 앞에서

사랑에 실패란 것이 있을까?

젬마. 장맛비 내리는 초여름이구나. 나는 사실 이 비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마음속으로 꽁꽁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으면 함께 떠내려가듯 후련해지거든. 맞아, 그렇게 내 감정을 누르지 않고 쏟아낼 시간이 필요했어. 왜냐면 나 이별했거든.


미래의 기대감으로 설렜던 날들은 점차 사라지고 권태로움이 기승을 부리던 때, 상대방의 입장보다는 서로에게 이해만을 요구하는 대화가 이어지던 어느 날 어김없이 이별을 직감해. 이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마지막에 대한 마음을 먹으며 마음을 접을 준비를 하는 나. 조금만 힘들어도 움츠러들고 선을 긋기 시작하지. 그러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결국 이별을 받아들이지. 그러고는 생각에 빠져. 분명 예견한 이별인데도 이별 후 찾아오는 이 쓸쓸함은 왜 항상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이별의 아픔을 알면서도 나는 왜 이별을 결심하고 또 행하는 것일까?


이번에도 그랬어. 빗속에서 가로등의 빛을 쫓아 날아가는 나방처럼 양쪽 날개가 빗물에 젖는지도 모른 채 앞만 바라보던 내게 어김없이 권태가 찾아왔고 끝내 이별을 결심했단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다른 것이 하나 있었어. 이별을 결심한 그 순간 내가 그를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이제껏 숱하게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난 늘 사랑에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평생 내가 죽어라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어떤 행복이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지. 오래된 연인들이 기념일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의 결혼식날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보면서,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먹을 것 입을 것들에 대해 고민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야. 내게는 없을 행복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말이지.


그런데 처음으로 이번 이별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 거야. 정말 내가 이제껏 사랑을 실패하기만 한 걸까? 사랑에 과연 실패란 것이 있긴 할까? 젬마, 나는 이런 글귀를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떠난 애인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가 내게 하고, 나도 나의 떠난 애인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에게 하지. 내가 그대를 떠나면 그대가 나에게 배운 사랑의 말을 그대의 새 애인에게 건네고, 지구의 사랑은 아무래도 그렇게 현명해지고 있는 거지. 오랜 세월 세상의 광물과 다 접촉해서 현명해진 지하수처럼.
그래서 말이지. 나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기보다는 그대에게 배울, 내 새 사랑의 말을 생각해보는 밤이고 싶어.
- 유성용의 <생활여행자> 중에서


어쩌면 내 사랑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지하수처럼 돌고 도는 그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단지 나의 사랑이 현명해지는 데에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뿐이지 않을까? 누군가와의 소중한 시간을 쌓는 사랑이 아닌 나 자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생에서 배워나가는 과정 일뿐인 것이 아니냐고. 이번 이별을 겪고 나서야 이별 후에 고통받던 내 마음만 보던 내가 사랑에 대한 기억을 더 진하게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야. 사랑이라는 것은 위태로워서 늘 그것을 행하려면 고통이 수반되기에 끔찍하기만 하다고 느꼈어. 그런데도 이별 앞에서 내게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구나 그리고 이 마음으로 내가 살아 있구나를 느낀다는 건 앞으로 내가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점차 성장하는 계기가 될 거라 믿으니까.


돌고 도는 지하수처럼

젬마, 이제는 사랑과 이별을 가지고 행복과 실패를 논하지 않고 내 사랑을 더 단단히 지킬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어보려고 해. 내가 느꼈던 사랑의 감정을 스스로가 아끼며 이별을 더욱 거뜬히 이겨보려고. 그러면 또 다른 사랑에 닿아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