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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 May 19. 2019

지금 나의 그림자는 안녕한가요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를 읽고

百의 그림자, 황정은

1독: 19. 5/1~10

2독: 19. 5/17~18


#그림자 


  <百의 그림자>는 <만인의 그림자>라고 읽히기도 한다. 꽉 찬 숫자 일백이 '모두', '만인'을 뜻한다는 것. 소설에서도 두 주인공 은교와 무재뿐 아니라 전자상가를 둘러싼 뭇사람들의 그림자가 소개된다. 

그래서 내 그림자가 일어섰을 때, 라고 여 씨 아저씨가 말했다.
녹아서 팥 물이 되어 버린 빙수를 마지막 한 수저까지 말끔히 먹고, 그간에 손님이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온 앰프 하나를 고쳐서 보낸 시점에 나온 이야기였다.
일어섰나요?
일어섰지, 나도.
여 씨 아저씨가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았다.
나도 살면서 이런저런 사정을 겪었는데 그림자 정도, 솟구치지 않을 수 있나. 우리 집 현관에서 말이야, 구두를 신고 있는데, 반짝 일어서더라고. 올 것이 왔구나 싶으면서 그 친구 생각도 나고,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은 이런 것을 목격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하면서 보고 있었어. 
(p. 43~44, 은교가 자신의 그림자 이야기를 하고 몇 시간이 흐른 후 여 씨 아저씨가)


소설 속에서 그림자는 평소에는 빛에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로 '나'를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일어서서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그림자는 '나'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돌아다니기도 하며, 입을 벌려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그림자를 볼 수 있고, 만지거나 밟을 수도 있다. 


욕실 쪽으로 서너 걸음 걷다가 넘어졌다. 분명 발이 걸렸다. 걸릴 만한 것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 끝이 반 뼘쯤 솟아 있었다. 바닥에 남은 것은 희미한데 거기서 솟아난 것은 조금 더 분명한 빛깔을 띠고 있어서, 내 그림자란 이렇게 솟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져 보았다.
종잇장처럼 얇고 맥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만져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느낌이라고 딱 말할 수 있는가 하면 그도 아닌 게 애매했다. 갓 솟아오른 그림자란 그토록 애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조금 더 솟구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은 피곤해서 내버려 두고 씻는 등 다른 일을 했다. 집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도 그림자가 몸을 따르지 않았다. 그림자 끝이 고정된 채로 몸만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솟아오른 그림자 쪽으로 자연스럽게 중심이 가 버린 듯 하고, 사슬에 묶인 발목처럼, 아니 끈에 묶인 개처럼, 아니 중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컴퍼스 처럼,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p. 133, 무재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그림자는 대개 마음이 쓰라릴 때에 ㅡ이를 테면 갑자기 삶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겁게 느껴지거나 억울해서 분통이 터지거나 하는 등 각자의 사연으로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일어선다. 무리해서 자식들과 부인을 미국으로 보내 놓았더니 "아버지가 창피하다"는 말이 돌아왔다던 여 씨 아저씨의 친구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숨진 아버지의 죽음을 끝내 부정하던 유곤 씨의 어머니도, 폐지 줍는 일로 다툼이 벌어지던 때의 동네 할머니도. 심경이 무어라고 딱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를 때에 그림자가 일어서고는, 자꾸 창문으로 올라간다거나 길이 없는 덤불숲을 헤쳐간다거나 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그림자'라는 모티프가 너무 생소해서 난해하다고 생각했는데, 특히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타인의 그림자를 보기도 하고 만질 수도 있다는 설정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누구나 상처를 갖고 있지만 쉬이 내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림자'를 각자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고통쯤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다음에 바로 언급할 테지만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림자가 일어섰다"는 것은 곧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의미로 읽었다. 


 그러나 책 후반부를 읽을수록 그림자와 관련한 것들을 '죽음'으로 귀결 짓기에는 더 복잡다단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독서 모임에서 좋은 동료를 만난 덕에 더 풍부하고 재미있는 해석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주로 소설 속에서 그림자가 일어서는 맥락에만 집중했는데, 대부분은 그림자가 갖고 있는 고유의 성질과 함께 엮어 해석했다. 


 기본적으로 그림자는 '나'로부터 파생되는 것이고, 빛이 있을 때에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림자는 빛의 위치나 강도에 따라 그 길이나 크기가 변하기도 하고, 명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빛과 대비되는 어둠으로써 존재한다. '나'로부터 파생되는 '어둠'이라는 점에서 그림자는 '내'가 갖고 있는 삶의 무게나 어려움, 고난, 고통을 상징하는 셈이다. 결국은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네 삶에는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때로는 이 불행이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에 "행복이 있기에 불행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점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림자와 관련된 가장 재미있던,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해석 중에 하나는 주체와 객체, 그리고 존재에 관한 것이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로부터 그림자가 파생된다. 그렇기에 '나'는 그림자의 주체이고, 그림자는 객체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객체인 그림자가 일어나서 독단적인 행동을 하고, 그럴 때면  주체인 '내'가 곧잘 그림자를 따라가게 된다는 건 곧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말한다. 삶이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으로 '내' 중심을 잃을 때에, 주체가 흔들리고 결국 객체로서의 그림자가 스스로 일어선다는 것.


그보다 나는 식구들의 반응이 이상했어. 그림자가 멀리 가지도 않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데, 이걸 보지 못하는 건지 못 본 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거야. 예를 들어서 이놈의 그림자가 말이지, 밥 먹는 식구들 틈에 앉아 있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거든. 그럴 때 다들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피해서 앉는데 말이야. 보시기며 새로 밥을 담은 사발 같은 것을 건네주거나 할 때도 내 그림자를 피해서 팔을 뻗고, 말을 나눌 때도 그림자의 좌우에서 서로를 보려고 머리를 좀 기울인 상태로 말하거나 하면서 말이지.
그림자는 보이잖아요?
보이지. 빤히 보이는 것을 두고 못 본 척을 하고 있으니 내가 직접 그림자가 있는 곳을 가리켜 보이며 그림자야, 그림자, 라고 말해도 말이야.
이렇게 살짝, 이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허공을 꼬집듯 왼 손 엄지와 검지를 붙여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아무래도 좋은 거구나, 나 따위 그림자를 따라가더라도 상관없다는 거구나, 싶기도 하지 않겠어? 에이 썅, 따라가고 말아 버릴까, 싶어서.
(p. 45, 여 씨 아저씨가 은교에게 자신의 그림자 일화를 말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그림자가 일어설 때는 '내' 존재가 무용하다고 느낄 때ㅡ 이를 테면 연이은 채용 불합격 통지를 받거나, 어딘가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질 때. 다시 말해 내 스스로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껴질 때 주체가 맥없이 무너지면서 객체인 그림자가 일어서 버린다는 해석이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p. 10, 무재가 자신의 그림자를 처음 본 은교에게)


그림자가 일어났다고 말하자 여 씨 아저씨는 눈을 깜박였다.
여 씨 아저씨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오른손엔 오실로스코프에 연결된 바늘을 쥐고 있었다. 흰머리가 다소 섞여서 잿빛으로 보이는 머리털로 수북하게 덮인 이마를 찡그리고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따라갔어요.
따라갔나.
조금 따라갔어요.
따라가지 말았어야지.
그러지 않으려고요.
암.
(p. 30~31, 은교가 그림자를 봤다고 말하자 여 씨 아저씨가)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그림자를 따라가지 마라"고 한다. 아내에게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래도 남몰래 그림자를 따라가거나 하는 듯 별로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나날이 핼쑥해지"다 "귀신같은 모습이 되어 죽고 만(p. 20)" 무재의 아버지나, "사람들이 쉬쉬하며 수군거리는 것처럼, 결국 그림자를 견디지 못해서 죽은 거라고 생각(p. 143)"하게 되는 할머니의 것처럼. 그림자는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덤불숲으로, 까마득한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갔던 은교의 그림자처럼. 십 삼층 높이의 아파트 창문으로 자꾸만 올라가던 기러기 아빠의 그림자처럼. 그림자는 죽음을 향하기에 사람들은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걸까. 그림자를 따라가는 건 곧 죽음일까. 


 마찬가지로 주체와 객체, 존재의 관점으로 볼 때 "그림자를 따라간다"는 건 곧 주체로서 '나'의 자아가 죽는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물리적인 죽음만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리라. 충격적인 사건으로 삶에 대한 태도가 백팔십도 변했거나, 혹은 삶이 송두리째 바뀌진 않더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어떤 금기가 생겼다는 말처럼. 그림자를 따라가면 내 안의 어떤 자아가 죽는 게 아닐까. 그림자를 따라간다는 건 결국 '내 자신을 버리는 것'을 의미할지도. 독서 모임에서는 소설 속 인물들의 그림자 외에 각자의 그림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림자가 일어설 만큼 삶이 힘에 부칠 때 우리는 종종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마주치게 된다는 점에 공감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됐던 그때에, 어쩌면 우리는 그림자를 따라갔던 게 아닐까. ** 


#도심 속, 슬럼이라고 불리는 전자 상가


이튿날 출근하는 길에 신문 가판대에 들러 보니 한결같이 전자상가 철거, 역사 속으로, 라는 방향의 제목을 달고 있었다. 수리실로 배달된 신문도 다름없었다. 여 씨 아저씨는 백반을 먹을 때 탁자로 사용하는 스피커 통에 신문을 깔아 두고 찌개를 먹으면서, 반찬 보시기를 이리저리 치워 가며 유심히 기사를 읽었다. 가동의 합의가 그토록 빨랐던 이유를 묻자 여 씨 아저씨는 너무 영세해서, 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상권도 거의 사라진 건물에서 권리금이랄 것도 없이 하루 벌어먹고살던 사람들이 이주비를 큰돈으로 여기고 받아서 나갔다는 것이었다.
당장 철거되는 것은 다섯 개의 건물 중 가동 하나뿐인데도, 기사 제목이 일률적으로 전자상가 철거로 마치 상가 전체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듯 구성된 것을 두고는, 그런 식으로 미리 상권을 죽여서 이후의 일을 쉽게 도모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죽어 가고 있는 놈더러 자꾸 죽어라, 죽어라, 한다며 여 씨 아저씨는 입맛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과연 그로부터 며칠간은 상가가 철거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수리실이 문을 닫았느냐, 이사를 했느냐, 묻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차례 걸려 왔다.
(p. 108~109, 가동 철거 소식을 알리는 기사가 난 후)


 개인적으로 <백의 그림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다섯 개 동 중에 단 한 개 동만 철거되는데 마치 상가 전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전자상가 철거", "역사 속으로" 같은 헤드라인이 붙었다는 장면이다. 여 씨 아저씨의 말마따나 "이미 죽어 가고 있는 놈더러 자꾸 죽어라, 죽어라" 하는 꼴인데. 이를 국민의 눈이 되고 국민의 입이 되어야 언론이, 그들이 달고 있는 헤드라인의 무게를 충분히 알면서도, 자본의 편에 서서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있다는 게 너무 처참해서. 마음이 먹먹했다. 그동안 내가 무심코 넘겨짚은, 무수히 많은 헤드라인들 너머에, 무기력한 소시민들은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테다. 


은교 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 라고 무재 씨가 자세를 조금 바꿔 앉으며 말했다.
(중략)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p. 113~115, 가동이 철거되고 자리 잡은 공원에 앉아)


 누군가는 "그곳에서는 범죄가 많이 발생하니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언급하는 지역에서, 누군가는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빈민계층이 불법 점거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되곤 하는 슬럼은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은교나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무재가. 슬럼이라는 단어를 소화해보려는 듯 되뇌고 또 되뇌는 은교와 무재가 짠하다. 


무재 씨, 나는 가마는 그냥 가마라고 생각했지 거기에 모양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인가요.
무슨 말이에요?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p. 37~38, 무재가 은교의 가마가 두 개인 걸 발견한 날 면옥에서) 


 이렇듯 소설은 헤드라인의 무게뿐 아니라, 우리가 평소 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사용하는 '언어의 무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은교와 무재의 처지로 보면 그들의 삶의 터전을 두고 너무나도 쉽게 '슬럼'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상당한 폭력인 셈이다. 하루아침 만에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인 그들에게 마땅한 사회 안전망을 마련해주지 않아도, 정부 탓 사회 탓을 하는 법이 없을 만큼 선량한 그들이건만. 사회는 되레 '슬럼에 사는 빈민 계층',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면 다시, 슬럼은 누가 만들었는가. 


문학의 할 일 중 하나는 우리가 현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명함에 관한 그 잘못된 믿음을 해체하는 일이다. 이런 공간에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말 그대로 실감하게 하고, 나의 공간과 삶이 소위 현실이라고 하는 것과 분리돼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는 일이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인 첫 번째 이유가 이것이다. 이 작가는 우리가 예외적인 곳이라 착각하기 쉬운 공간을 보편화하고 우리가 다 안다고 믿는 종류의 사람들을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진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p. 175, 작품 해설 1 현실─자명성의 해체 중)


 이토록 '언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작가라니. 어쩌면 삶이 지독하도록 고독할 때 일어난다는 '그림자'는, 각자의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을 함부로 '불행하다'거나 '망가졌다'고 섣부르게 낙인찍지 않기 위해 씌운 메타포가 아닐까. 


#인상 깊게 읽은 구절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 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 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렇군요.
(p. 17~18, 은교가 처음 자신의 그림자를 본 날, 무재와 산길을 내려가면서)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라고 말하며 무재 씨는 주먹만 하게 줄어든 무를 쥔 손으로 마뜨료슈까를 가리켜 보였다.
기본적으로, 사는 것이 그렇다고 나는 생각해 봤거든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그림자들을 목격하면서, 그런 생각을 조금씩 삼켜 왔다고나 할까, 점차로 물이 들었다고나 할까.
(p. 141~142, 무재가 은교에게 메밀국수를 만들어 줄 때 무재의 집에서)


하늘이 굉장하네요.
네.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 유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별이요?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고.
……무재 씨,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도시일까요?
하며 무재 씨가 웃었다.
아무튼 이런 광경은 인간하고는 너무도 먼 듯해서, 위로가 되네요.
(p. 160~161, 은교와 무재가 맑고 개운한 국물을 먹으러 간 섬에서)




 *그 외에 그림자에 관한 또 흥미로운 시각은, 삶은 3차원인데 반해 그림자는 2차원이라는 점. 실재하는 존재로서 인식되는 우리는 아무리 색안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계급이나 계층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반면에 그림자는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하게 까맣고 뿌옇다는 점이 있었다. 다시 곱씹어보면서 느끼건대, 내가 독서 모임에 가지 않았다면 절대 생각지 못했을 관점이다.


 **그럼 정말 그림자는 따라가선 안 되는 걸까. 독서 모임에서 나는 내 그림자가 처음 일어섰을 때로 처음 들어간 스타트업에서 심각하게 퇴사를 갈망할 때를 언급했다. 업무 강도가 높기로 악명 높은 그곳에서 나는 자의로 타의로 스스로를 소진하면서 "이렇게까지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회의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남을 험담하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을 함부로 비난하고 험담하는 걸 곱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때의 내게 불만과 불평 늘어놓기, 남 헐뜯기는 나의 어떤 방어 기제라고 굳게 믿었다. 그림자를 따라간 결과가 이런 모습이라면, 따라가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림자를 따라간다'는 게 '내 자신을 버리지 말라', 더 나아가서 '내려놓지 말아라'는 것이라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놓지 말고 버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아무리 삶이 버거워도 힘을 내야만 하고, 놓지 말고 버텨야만 하는 걸까. 나는 역경과 고난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말이 "우리,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자",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던진다고 역시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저마다의 그림자를, 그리고 저마다 그림자를 대하는 태도를 그저 담담히 보여줄 뿐 그림자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동료들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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