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오빠인 나사로가 죽고 나서야 집에 오신 예수님께, 마르다가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1)" 그러자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야기하신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다시 이야기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3)"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마음 깊이 믿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다. 지금 오라버니를 살려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기엔 너무 말이 되지 않으니, 마지막 때에 부활을 말씀하시며 위로해 주시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예수님께서 꿰뚫어 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모든 생명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있느냐는 질문에 마르다는 즉시 반응한다. 그러니 순간적으로 대답이 바뀌었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앎이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을 훤히 바라보시고, 문제점을 파악하시며, 바로잡아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말씀을 읽던 엊그제의 나에게도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하셨다. "종연아 너는 나를 믿니?" 나는 선뜻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요 근래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하며, 삶에서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음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내 모습들을, 짧은 질문을 통해서 돌아보게 하셨다. 그가 만유의 주인이심도 알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도 알지만, 삶의 문제 앞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내 믿음에는 아무 능력이 없었다.
어제는 내 오랜 두려움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온 이 학교의 자리가, 내게 맞지 않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의 씨앗이 심긴 날이었다. 그 씨앗의 냄새를 맡자마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3년간의 방황에서 내가 마주했던 광야에서 맡았던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만난 그 큰 벽 앞에서, 나의 다리는 무너졌다. 그 두려움 앞에서, 나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아니,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렇게 아무도 없는 학교 교회에서, 난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을 믿어보려고 여기 나와서 몸부림치고 있는 나를 좀 봐달라고. 마르다에게 하신 것처럼 내게도 말씀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던 내게 오늘 이 말씀을 보여주셨다. 세상이 자신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말이다. 자신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만, 남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궁금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실지. 그리고 내 기도들은 정말로 땅에 떨어지지 않은 것일지.
이어지는 말씀에는 죽으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니?' 질문하시는 예수님이 계셨다. 그 예수님을 뵈오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정말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 이외의 다른 것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그러니 정말 당신이 나를 이끄시는 곳이 푸른 초장임을 믿게 해달라고 더 기도하려고 한다. 이렇게 흔들리는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믿으라고 하시던 예수님이, 오늘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시기 때문이다.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