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때가 있다. 앞이 네모라고 그 전체를 네모로 보았다가는 돌아앉은 세모에 놀랄 수도 있고, 시작이 작은 구멍이던 것을 깊이 파 내려가다 보면 커다란 동굴을 만나기도 한다. 산허리에 잘록하게 나온 돌부리도 공사를 하느라 산을 깎다 보면 불쑥 바위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지척에 살고도 자주 볼 수 없는 언니는 말이 빠른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꼭 붙어 다니며 미주알고주알 신상을 털어놓고 살다 보니 서로 허물없는 자매가 되었다. 그러니 내가 언니와 마주하고 앉으면 앞뒤 전후 사정없이 ‘아 문디’를 먼저 들어야 했다.
언니가 말하는 ‘아 문디’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오래간만에 만나 차 한잔을 앞에 두고 한 두 마디 털기도 전에 ‘아 문디’ 하는 것은 오래간만에 만나 반갑다는 뜻이다. 대화 내용과는 무관한 언니의 애정 표현이다. 다음 대화를 이어가다가 일벌이기를 좋아하는 내가 어떤 계획을 말하면 “아 문디 지랄한다.”라는 말로 태클을 걸기도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니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문디’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뜻하는 ‘문디자슥들’을 줄인 말이다. 언니가 입버릇처럼 하는 그 말을 누구든 곧이곧대로 들었다가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듣기 싫은 소리도 자꾸 들으니 언니와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도 같고 그 말에 전염이 되었는지 내 입에서도 가끔 그 말이 튀어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문디’라는 말이 내 기억 속에 나쁜 의미로 기억되던 때가 있었다.
면 소재지 중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다른 초등학교 출신과 함께 공부했다. 그중 한 곳이 성애원이다. 문둥병 환자들이 마을을 이루며 사는 곳이었다. 주택 모양이 개별주택보다는 공동주택처럼 큰 건물이 마을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곳에서 양계장을 해 생계를 꾸려간다고 했다. 고장에서 나는 계란 대부분이 그곳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이었다.
문둥병 즉 나병은 천형병(天刑病)이라고도 불렀다. 하늘이 형벌로 내리는 병이라고 하여 이병에 걸린 사람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몸이 썩어들어가고 전염성이 강하다는 인식 때문에 다들 피했다.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야만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처럼 여겨졌다.
옛날 한 의원이 문둥병을 앓는 이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스스로 찾아가 치료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조만간 큰일을 칠 것이라며 혀를 찼다. 민심은 흉흉했고 보릿고개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밥을 구걸하러 동네를 나도는 문둥병 환자들을 짓밟고 매몰차게 내몰았다. 재수 없다며 침을 뱉고 동네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먹을 것이 없었던 문둥병 환자들은 의지할 곳 없이 산속을 헤맸다.
그러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문둥병 환자가 문둥병에 걸리지 않은 어린아이를 잡아먹으면 문둥병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것이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의 문밖출입을 막고 집안에서만 지내게 했다. 의원은 그것은 근거 없는 헛소문이니 휘둘리지 말라고 말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문둥병자들과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물과 기름같이 헛돌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의원이 집으로 갔을 때 황급히 달려 나오는 아내를 만났다. 아홉 살 아들이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원은 아내와 함께 하루를 꼬박 아들을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아들이 문둥병자들이 사는 산 초입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급히 산을 올랐다. 해는 지고 산속은 칠흑 같은 암흑이었다. 멀리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움막이 보였다. 그 움막으로 향하는 의원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손끝으로 움막 거적을 들쳤을 때 그 안에서 의원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문둥병자 부부와 어린 아들 둘이서 고깃덩이 하나씩을 뜯고 앉아있었다. 그 아들 중 한 아이는 의원의 아들이 입고 있던 조끼와 마고자를 입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의원은 그 자리에서 부부를 죽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원을 다시 만났을 때 의원은 예전처럼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들의 조끼를 걸치고 있던 문둥병자의 아이가 의원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드라마는 내 유년을 흔들 만큼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성애원을 문디촌 이라고 불렀는데, 그 문디 라는 말만 들어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유년시절부터 학습되어온 문둥병 환자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최근 소록도 마가렛 수녀의 기사를 접하면서 조금씩 흔들렸다. 한센병즉 문둥병 환자들도 예방주사 하나로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잘못된 지식과 편견으로 그들을 소외시키고 외면했던 지난 일들이 떠 오르면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사람을 이해하기에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에 편견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지 한 번쯤 돌아볼 시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