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가 필요한 순간

판타지

by 최미정

봄이 온 줄 알았는데 겨울이 봄을 시샘하나 보다. 시내 골목길을 걷는데 바람이 날카롭게 살을 파고든다. 복학을 앞두고 곧 집을 떠날 아들과 추억을 쌓기 위해 시내 맛집을 찾아다녔다. 맛있는 음식을 직접 요리해서 차려주면 좋겠지만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전문 요리사의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추운 날씨 아들과 옷깃을 여미며 골목길을 도는데 곳곳에 임대라고 쓰인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추운 날, 싸늘히 식은 공간을 보니 마음이 헛헛해진다. 활기찼던 골목이 어느새 그림자에 잠식당한 것처럼, 을씨년스럽다. 경제가 어렵다고 말만 들었지 불 꺼진 점포들을 보니 더 실감이 났다. 빈 건물들 아래에는 그림자도 숨어버렸다. 그림자 없이 걷다 보니 내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는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문방구에 들렀다. 나는 습관처럼 빈 노트만 보면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이를 보면 펜을 들고 뭔가라도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글이 아니면 그림이라도 채워야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비어있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습성이 생긴 것 같다. 비어있는 공간은 무언가로 채워야 하고 하얀 여백에는 글로 채워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 임대라는 글자를 방패 삼아 비어있는 건물을 보면 허전함이 몰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빈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남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홀로 있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을수록 나를 몰아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채우려고 하고 빈손인 채로 서 있는 것을 참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날 아이들의 빈방을 만나면 한동안 허전함이 몰려올 것이다. 그러나 삶은 비워내야 새로움으로 채워진다. 찰나의 쓸쓸함을 견디는 훈련이 필요한 순간이다. 인생의 작은 틈을 감내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판타지가 아닐까.

최근 아이들 동화책 쓰기 지도를 하면서 깨달은 점은 아이들은 판타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다른 또 다른 판타지 세상을 만나는 일은 힘든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새로운 법과 질서를 만들고 원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만나고 싶은 인물들을 그려내는 일, 그 작업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때로 우리 어른도 아이들처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름다운 모습을 꿈꿔 봐도 좋다. 그 모습을 하얀 종이에 글로 채워보면 더할 나위 없겠다. 현실의 힘듦을 뒤로하고 여유를 찾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가장 좋은 날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그날을 위해 발자국을 찍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게 다가온다.


동화에 쓸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아홉 살, 까만 눈의 여자아이를 만났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기에 쓸 이야기가 그리도 많을까? 그렇다면 우리 어른은 아홉 살 여자아이보다 쓸 이야기가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텅 빈 마음이든, 채워진 마음이든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라면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돌아오는 봄에는 모두가 상상하고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를 말해 줄 수 있는 짧은 한 문장이 나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되면 텅 빈 골목 상권도 텅 빈 방도 조금씩 틈새가 메워져서 아름답게 채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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