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부저소리와 함께 시합이 개시된다. 엔리코는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세운 펜싱 특유의 자세로 칼을 들고 앞뒤로 움직이며 다가온다.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다. 팔과 다리가 유난히 길다. 거리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엔리코가 앞으로 한 걸음을 크게 내딛으며 칼을 찔러온다. 내 목검과 달리 엔리코의 칼은 부드럽게 흔들린다. 연검처럼 심하게 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궤도를 예측하기가 힘들다.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서면서 목검을 위로 들어 엔리코의 칼을 쳐낸다. 충격에 놀랐는지 엔리코도 물러선다. 나는 시합을 오래 끌 생각이 없다.
나는 목검을 휘두른다. 목표는 엔리코의 칼과 손잡이가 이어지는 부분이다. 목검이 금속과 부딪히며 맑은 종소리 같은 소리가 난다. 엔리코는 신음과 함께 칼을 떨어뜨린다. 아마 손가락이나 손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나는 바로 다음 동작으로 들어간다. 목검으로 엔리코의 목울대를 겨눈다. 보통은 이런 경우 목 바로 앞에서 검을 멈추지만, 나는 부러 울대에 목검을 직접 대고 누르면서 압박을 가한다. 엔리코는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검끝을 통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목을 부러뜨리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전달한다. 점수를 표시하는 전광판도 전자감응장치도 변화가 없다. 하지만 이 승부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모두가 알 수 있다.
나는 보호구를 벗고 인사를 한 후에 시합이 진행된 플로어에서 내려온다. 이탈리아 측에서 통역관에게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한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표정을 보니 항의를 하는 것 같다.
-재시합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말한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또 하면 진짜로 죽는다고 경고했으니까요.
내가 말한다. 내 위협이 통했는지, 부상 때문인지 엔리코는 재시합을 포기한다.
내가 엔리코에게 이겼을 뿐, 한국의 검술이 이탈리아의 펜싱보다 강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강하고 약한 것은 사람이지, 유파나 기술의 우열은 없다. 죽고 죽이는 싸움을 위해 사브르를 휘두르는 사람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선생 덕분에 이번 순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계속 잠만 잤다. 아내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는 꿈을 꿨다.
검도왕전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원래 검도는 인기가 없다. 호면 때문에 선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선수들의 동작과 죽도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대부분의 관객은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다. 관중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수들의 기합 소리를 들으러 경기장에 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보통은 선수들의 가족과 지인들만 드문드문 관중석에 앉아 있다. 하지만, 올해는 대통령이 개회사와 공개연무를 한다는 소식 덕분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관중석이 가득 찼다. 의례적으로 나와 있는 기자 몇 명이 아니라, 모든 신문과 방송이 취재를 하러 왔다. 얼핏 세어 봐도 카메라가 몇백 개는 넘게 있었다.
대통령의 개회사 겸 축사는 ‘가슴이 뜁니다’로 시작해 ‘축하합니다’로 끝났다. 대통령은 1분밖에 말을 하지 않았지만, 체육관에 모인 사람들을 완전히 집중하게 했고, 검도인이 아닌 일반 관중들조차 검도왕전이 대단히 의미 있는 대회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회에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나도 내가 이런 엄청난 곳에서 우승을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짧지만, 훌륭한 연설이었다. 형편없는 연설자만 깊이가 부족한 것을 길이로 대신한다.
대기실로 돌아온 대통령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연설은 대통령의 전문분야지만, 공개연무는 완전히 초심자였다.
-많은 사람 앞에서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대통령이 말했다.
-연습한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사람이 많다고 베어질 것이 안 베이는 일은 없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공개연무는 8강전이 끝나고 하기로 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자세를 점검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면서 대기실 벽의 TV로 시합을 지켜봤다. 아직도 검도대회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과 검로는 실망이었다. 검술의 멸종 징후를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얼마나 더 지연시킬 수 있을까. 나는 사부의 말이 떠올라 비월을 꽉 그러쥐었다. 무엇이든 단칼에 벨 수 있는 최강의 검술로도 벨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 방송과 함께 대통령의 순서가 왔다. 대통령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습 때 대통령은 3단 짚단이라면 열에 아홉, 5단은 열에 여덟을 깨끗하게 잘랐다. 실패해도 완전히 잘리는 않는 것이 아니라, 단면이 약간 지저분하게 남을 뿐이었다.
전광판에 대통령의 모습이 비추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른다. 대통령은 짧게 손을 흔들고 다시 집중한다. 도복 탓인지 몰라도 온전히 한 명의 무도인의 모습 같다. 대통령은 천천히 검을 뽑아 짚단 앞에 선다. 우선은 세 개, 사선, 수평, 사선으로 1단 짚단을 벤다. 완벽하다. 관중의 함성이 커진다.
3단 짚단 앞에서 대통령은 잠시 자세를 고쳐 잡는다. 기합과 함께 검을 치켜든다. 대통령의 기합은 크지도, 길지도 않다. 대통령이 검을 휘두른다. 깨끗하게 짚단이 잘려 나간다. 이번에는 관중의 박수가 늦다. 다들 감탄하기 전에 놀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조금 놀란다. 연습 때보다도 훨씬 움직임이 좋다. 대통령은 역시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을 때, 뭐든 더 잘하는 체질인 모양이다.
마지막 5단 짚단 앞에서 대통령은 검집을 허리에서 풀어 앞에 세우더니 그대로 검을 집어넣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