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꿈은 허무하긴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방식이다. 모든 게 꿈이라는데 어쩌겠는가. 다만, 부끄러움은 읽는 사람 몫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얻는 위와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지금 내 상황을 들여다봤다.
우선 내가 혹시 게임의 캐릭터가 아닌지 자문해봤다. 꽤나 존재론적인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쉽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도서관 덕분이었다. 어떤 게임 개발자도 수만 권이나 되는 책을 게임 속에 입력해 놓을 수는 없었다. 비슷한 질문을 했다는 철학자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된다.
나는 도서관에 간다. 고로 존재한다.
남은 것은 이 반복에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내가 타임루프를 탈출하는 방법과도 직결될 터였다.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었다.
연애와 취업.
전자는 주로 일본의 라이트노벨과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작품에서 많이 등장한다. 감정이 메말랐거나, 바람둥이인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타임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이다.
나는 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제 시간으로 우리는 이틀 전에 헤어졌지만, 수십 주나 루프를 반복하며 도서관에 다닌 탓에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 거였다. 반가웠고, 저절로 애틋함이 생겼다. 나는 서툴지만, 진정성 있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드디어 진짜 사랑을 깨달았다고, 네가 나의 평생의 짝이라고.
-오빤 미래가 없어. 다신 연락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다시 화요일이 되면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몇 번 더 시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찾아가서 촛불과 꽃으로 이벤트를 해도 그녀의 대답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런 애가 내 진정한 사랑일 리가 없어.
나는 자위했다.
남은 것은 취업이었다. 애초에 면접 통보 전화로 시작하는 타임루프니 그쪽이 개연성이 높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재취업이다. 1년 전까지는 나도 회사원이었다. 6개월만 더 다녔으면, 대리가 됐을 것이다.
졸업을 앞둔 학기에 학교 대강당에서 취업 박람회가 열렸다. 나는 성적이 우수했고, 공학인증을 받았고, 다양한 종류의 자격증도 있었고, 토익 점수도 높았다. 박람회장에는 도서관의 책장처럼 수백 개가 넘는 회사의 부스가 있었다. 나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고 도서관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책장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구석에 있는 ‘베스트 파이프라인’의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 소개란의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함께 세상의 혈관을 만들어갈 인재를 찾습니다.
안내 책자에 규칙적으로 배열된 파이프 사진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면접관이 장점을 물었을 때, 나는 성실함이라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모두 개근상을 받았고, 대학에 와서도 버스가 교통사고 났던 한 번을 제외하면 결강한 적이 없었다. 연수기간에 내 성실함은 바로 인정받았다.
베스트 파이프라인은 그 이름처럼 파이프와 관련된 일을 하는 회사였다. 아파트와 주택에 수도관과 가스관이 지나가도록 설계와 시공을 했고, 공장의 공업용수 유입, 배출관을 만들기도 했다. 몇 년 전에는 리비아의 송유관 공사를 따내서 400% 성장을 이뤄냈다. 나는 6년을 일했지만 실제로 파이프를 본 적은 없었다. 설계는 설계팀에서 했고, 공사를 따오는 것은 이사진이 했고, 공사는 시공 팀에서, 시공 후 관리는 관리팀에서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설계팀이 만든 설계도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입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설계도면으로 공사를 할 수는 있지만, 고객들은 2차원으로 된 설계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3차원의 모형으로 보여줘야 했다. 일은 쉬웠다. 도면의 숫자들을 입력하고, 건물과 파이프의 선을 긋는 것이 다였다. 나머지는 2천만 원이 넘는 프로그램이 알아서 해줬다.
생각해보면 회사생활도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출근카드를 긁으면 팀장이 도면을 준다. 나는 도면을 보면서 컴퓨터를 켠다. 광학펜과 함수전용 계산기, 제도기 세트를 꺼내 순서대로 정리한다. 도면 왼쪽 상단에는 파이프 모양의 로고가 찍혀 있다. 도면을 보면서 광학펜을 움직인다. 광학펜의 움직임을 따라 화면에 파이프가 생긴다. 파이프를 그릴 때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연상한다. 전체를 보면 미로처럼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 같지만 나눠서 보면 ㄱ, ㄴ, ㄷ, ㄹ, ㅏ, ㅓ, ㅣ, ㅗ, 의 글자들을 이어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인다. 보통 하루에 기역을 마흔 번, 니은을 서른여덟 번, 디귿을 네 번, 아를 열세 번, 어를 열한 번, 이를 스물세 번, 오를 열여섯 번 정도 그린다. 미음 모양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파이프가 미음 모양이면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든 입구도 출구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매일 새로운 도면이 왔고, 도면엔 항상 다른 숫자가 쓰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건설회사에서 만든 똑같은 16층 아파트인데도 가스관과 수도관은 전혀 다르게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3년 전에 작업했던 공장의 영상을 새로 짓는 공장의 영상에 덧붙여본 적이 있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래야 우리가 돈을 벌지.
모든 건물의 파이프라인 설계가 다른 이유를 묻자, 설계팀에 있는 입사 동기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자리가 사나우니 조심해.
내가 사직 권고를 받은 날 아침에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