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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n 13. 2021

우산 좀 없으면 어때서

2020년 10월. 가을이었다. 아직은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밤. 저녁을 먹고, 자전거를 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벌레가 이마에 날아와 부딪혔다.


'딱' 소리를 내면서. 때마침 나는 엄청난 다짐을 하며 페달을 힘 있게 밟고 있었다. 힘 있게.


'그래, 후회 없이. 해보는 거야. 그리고 계속 앞으로 가자.'


 대충 이런 다짐이었다. 2020 10 가을밤의 나에게는 정말 어마어마한 마음가짐을 갖는 찰나였는데, 이마에 부딪힌 벌레가 있었다. 벌레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보다 통증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다짐은 이마의 부딪힌 벌레와 함께 날아갔다.


2021년, 겨울은 벌써 지났고 이제 봄이다. 요즘은 지나는 길에 시선을 돌리면 하얗고, 붉은 꽃들이 눈에 보인다. 피어나고 있는 봄. 나는 지난가을과 겨울에 적어 둔 글들을 조용히 읽는다.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달아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있던 자리에서, 돌아보고 싶은 나의 마음에서 고개 돌리고 내달렸다. 열심히 달렸는데,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었나.


2021, 여름. 장미가 폈고 내가 앉은 카페  너머로 비가 내린다. 소나기 같다. 어떻게 알고 준비한 우산을 펼쳐  사람들과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지나는 사람들.


지난가을 갑자기  이마에 부딪힌 벌레와 함께  다짐은 정말 날아갔을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걸까. 다른 누구의 마음도 아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나의 매일과 내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기를 그리고 누구보다 나에게로. 그렇기를 바란다. 오늘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그치기를 기다리거나,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거나. 아무리 많은 계획을 하고 다짐을 해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아직 봄이 오기 전, 친구를 만났다.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다시 만났다. 친구는 종교를 가졌고, 나는 종교가 없다. 힘들게 달아나고 있는 내게 친구가 제안을 했다. 자신과 함께 성경을 읽어 보자고. 친구를 따라서 그리고 내게 준 그 마음이 고마워 함께 성경을 읽었다. 어느 밤, 친구가 읽었던 성경 구절을 듣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  잠언 19, 21


가을과 겨울을 지나면서 온갖 계획과 다짐을 하며 내달리기만 했었다. 이정표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몸도 마음도 망가지고 더는 움직일 힘이 없어 가진 것을 다 쏟아내기 바빴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매일 하는 다짐은 매일 무너졌고, 나는 매일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뤄지지도 않을 많은 꿈을 꾸고 또 잃고. 정말 내가 잃어버린 것인지조차 알길 없이 가져보지도 못한 매일만 가득했다.


여름이다. 옮기는 걸음마다 땀이 맺힌다. 매일이 덥고 지치고. 그래도 요즘엔 많이 웃는다. 가을에 했던 다짐은 이 여름에도 여전하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다만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몸이 절로 나아가는 자리로 가고 싶다. 눈 앞에 없는 것은 많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알았다.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을 지나 여름에 오기까지. 스스로 만든 자신의 모습을 놓치지만 않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비가 내리지만 우산은 없다. 준비하지 못해 비를 맞는다고 해도 괜찮다. 그 비로 내가 가진 것들이 씻겨 내려가지는 않으니. 그저 지나는 비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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