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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Sep 14. 2021

늘이거나 줄이거나 혹은 바꾸거나

처방약이 줄었다는 것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늘었다는 말. 그래서 힘들 수 있다는 말.


나는 아직 괜찮지 않다. 그럼에도 좋은 면을 꼽아본다면, 몇 개월에 걸쳐 처방약이 꾸준히 줄었다는 것. 매일 울지 않고, 가끔 운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 소리 내 엉엉 울 수 있다는 것.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사방이 어둡고, 브레이크를 밟는 시간이 현저하게 적은 도로. 시간과 공간이 모두 빠르게 이동하는 것 같지만 나는 계속 동일한 자리를 달리는 것 같은 밤이었다. 3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착했다. 다리와 허리, 어깨 그리고 눈의 긴장이 모두 풀렸다. 캐리어 속 짐은 풀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씻고 약을 삼켰다. 12시가 다 되어서 하루를 마감했다.


2시가 넘고, 3시가 넘어서 잠에 든다. 아침에는 9시가 넘도록 몽롱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일만으로도 하루 절반의 에너지를 다 쓴다. 방에 고요가 쌓여 있어 tv를 켜서 소음으로 정적을 몰아낸다. 그리고 두 다리를 바닥에 세운다. 간단한 아침. 혹은 거르는 아침. 솔직히 아침을 시작하는 일이 버거워서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까지 미루고 미룬다.


의사는 처방약의 용량을 줄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다음 예약 시간에 뵐게요."

"네."


간결한 인사와 짧은 대답.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생각한다. 진료를 시작하고, 처방을 받아 문을 나서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15분에서 20분. 절반은 기다리는 시간. 열리는 진료실의 문을 바라본다.


잠에 이르는 시간은 조금 멀어졌다. 깨어나는 시간은 빨라졌다. 시작을 미루지 않고 침대에서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이토록 작은 변화에도 하루의 시작과 끝이 달라지는 사람이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오늘내일이 극과 극으로 내달리는 사람. 여전히 휘청이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걸린 시간을 돌아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좋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아닌 상황.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말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냥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나는 매일 다른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뿐이다. 의사는 내가 잠들기 전에 삼킬 약의 용량을 늘이거나 줄이거나 혹은 바꾸거나.


"그래도 약은 거르지 마세요."

"스스로 감당할 몫이 늘었기 때문에 조금 힘들 수 있어요. 약은 바꾸지 않을게요."



"한 달 후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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