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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Oct 11. 2021

계절의 틈

애매하고 모호한 나의 계절

지하철역을 나와 자전거를 대여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데 연주곡이 흘렀다. 지나가는 자전거들을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누군가 크게 음악을 듣는다고 하기에는 악기 소리가 너무도 깨끗했다. 


플루트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달리는 자전거의 바퀴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저 페달에 올린 발에 힘을 주어 내달리지 않으며 천천히 할아버지의 연주를 듣고 공원을 가로질렀다. 공원에 퍼진 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계절의 틈은 늘 애매하다. 여전히 덥고, 그 사이로 옅은 가을의 바람이 불었다. 공원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플루트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그의 맑은 소리가 지나는 계절을 기리는 것인지 찾아올 계절을 반기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벤치에 홀로 앉아 두 손에 악기를 들고 바람을 불어넣고, 손가락을 움직여 곡을 연주하는 모든 모습이 마치 작은 의식처럼 여겨졌다. 


애매한 계절. 애매한 실력. 모호하고 애매한 것들. 


자전거를 반납했다. 아주 잠깐 페달을 밟았는데 땀이 맺혔다. 그리고 곧 식어버렸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늘어선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공원에서 들었던 플루트 연주가 떠올랐다. 넓은 공원의 한 벤치에 홀로 앉아 연주를 했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소리가 서툴게 들리지 않았는데, 얼마나 오래 그렇게 지내오셨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몇 해의 계절을 반복해 오셨을까. 


핸드폰을 켜서 메모를 남긴다. 혹시나 이 순간을 놓칠까 싶어서. 그리고 어쩌면 나의 매일이 그리고 나의 내일이 애매한 계절의 틈처럼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계절과 계절 사이. 아침이면 긴 팔을 입어야 할지 몇 번을 고민하게 만들고, 몇 겹의 옷을 입고 수시로 변하는 온도에 따라 겹겹의 옷을 벗고 입으며 하루를 보내야 하고, 두꺼운 옷들을 차마 다 정리하지 못하고 얇은 옷들 사이에 남겨두며 갑자기 추워질 하루를 염려하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어 고민하고, 여지를 남겨두게 되는. 그래서 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매일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가진 애매하고 모호한 것들이 나를 세우기도 하고 주저앉히기도 한다. 뚜렷하게 잘하는 게 없어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도 할 수 있는 나로 살아가고 있다. 또 더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기를 주저하게도 한다. 그럼에도 또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플루트를 연주하기 위해 공원으로 나서게도 한다. 


누구에게나 멋진 연주를 할 수는 없지만, 매일 연주를 하며 사는 삶. 누구도 듣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연주로 혹은 그 작은 행동만으로도 이렇게 풍족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이렇게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애매한 나는 멋진 문장을 쓸 수는 없지만 매일 나의 문장을 쓸 수는 있다. 설령 누구도 읽지 않는다 해도. 얼마나 더 많은 계절과 그 틈을 나에게 남기며 지내게 될까. 그 사이사이에 공원에 앉아 어떤 문장들을 짓게 될까. 어쩌면 한 곡도 완성하지 못한 채로 곡의 도입부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쥔 악기를 내려놓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완성하지 않아도 매일 나의 연주를 시작할 수 있는 삶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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