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에는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은 길이를 다듬기도 했고, 펌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를 넘어섰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등을 다 덮게 될 것 같았다. 몇 년 전에는 등 절반을 넘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르고 싶으면 잘라요. 혹 망치면 미용실에서 다듬으면 되죠."
모든 것이 싫어졌을 때,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울다가 이제 막 어깨를 넘어 등을 덮으려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엉망이 됐다. 나의 상황도 머리카락도. 그리고 찾아간 미용실, 미용사분이 내게 말했다. 머리카락은 또 자라고, 망치면 미용실에 와서 잘 다듬으면 된다고. 자기가 잘라서 엉망이 된다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혼자 울면서 머리카락을 잘랐던 내가 떠올랐다가 거울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를 보다가. 망가진 머리카락을 다듬으려 결국 미용실을 찾아온 나였다. 그의 말처럼 된다면 어떠했을까. 엉망이 되어도 되돌릴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처럼 산다면. 머리카락이 자라듯이 산다면.
그냥 기르다 보니 이만큼이나 자라 있었네. 이번에는 이렇게 펌을 해봐야지. 망치면 묶으면 되지. 오래도록 긴 머리를 유지했으니까 이번에는 아주 짧게 잘라야지. 종종 허리까지 긴 머리를 했다가 귀까지만 오는 짧은 단발로 머리카락을 자르곤 한다. 그렇게 한 번에 머리카락을 자르러 가면 늘 질문을 받는다.
“아깝지 않으세요?”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길렀던 머리카락을 잃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그 무게를 덜어내는 순간 스스로가 가벼워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미용실에 가는 경우는 짧은 머리카락을 다시 기르기 위해 펌을 하러 가거나 그렇게 기른 머리카락을 다시 짧게 자르는 때이다. 이때의 나는 어떤 망설임도 없으며 주저하는 일은 없다. 이렇게나 단순하고 과감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일에 조심하고 혹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 걸음 한 번을 떼는 것도 몇 번의 고민을 거듭하는 나인데.
“웃으시네요? 대부분은 많이 아까워해요.”
3년이 넘게 기른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나간 후였다. 미용사가 한 손에 나의 머리카락을 쥐고 말했다. 내가 웃고 있었다고. 거울을 보니 아쉬움이라곤 전혀 없이 오히려 웃으며 앉아 있었다. 턱 아래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원했다. 짧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가벼워진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처럼 산다면. 머리카락을 자를 때의 나처럼 산다면. 짧은 길이가 허리까지 닿을 때쯤이면 삼, 사 년이 훌쩍 지나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겼었던 일들도 빠르게 지나 등 뒤에 놓인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싹둑. 덜어낸 무게만큼, 잘린 길이만큼 홀가분해진다. 모든 기억과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거리를 둘 수 있다. 잊을 수 없다고, 혹은 되돌릴 수 없다고 계속 엉망인 채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의 생활과 삶을 다듬을 미용실은 없지만 머리카락은 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