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있게 초라해질 것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계속 쓰고 만들며 살아가야지'라고 스스로 하는 약속. 그리고 홀로 남긴 기록.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기간 동안의 기록을 그러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로 한다. 어떤 문장들을 쌓을지 그려본다.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사그라든다. 단어가 문장이 되지 못하는 생각. 무작정 쓸 수 없어 시간을 벌기로 한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모으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물론 다 써버린 너와 나를 채우기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가고 싶고, 늘 머물고 싶은 곳을 여행지로 정했다. 도착한 곳에서 떠나온 자리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정리하고 싶었다. 작은 그리고 큰 바람.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 여유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달리 무얼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들었다. 몇 개월 전에 산 산문집. 읽을 여유가 없어 미루다 여행길에 들고 왔다. 쓰고 싶은 문장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됐다.
기대와 바람은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작가가 전하는 말을 읽는 것만으로도 의기소침해진다. 그의 단어와 문장 표현이 나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라 스스로의 글이 가차 없이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진다.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어림없는 일인 것만 같다. 그가 말하는 '어림'이 내게는 넘기 어려운 고개가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하는데 문을 여는 것조차 터무니없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손에 쥔 손잡이를 돌릴 수 있을까. 걱정이 기대와 바람을 가르고 끼어든다.
자신 있게 초라해질 것
조용하지만 크게 울 것
부족한 채로 걸어 나갈 것
돌아보지만 돌아서지 않을 것
책을 덮었다. 작가를 따라 나의 책을 그려 보았다. 만들고 싶은 책, 담고 싶은 문장은 어떤 것들일까. 그처럼 적어 본다. 완성하고 싶은 그림조차 명확하지 않은데 스케치를 시작할 수 없겠지. 짧은 문장부터 시작한다. 내가 쓴 책은 저런 모양이면 좋겠다. 나의 모습이 저러하면 좋겠다.
바람은 바람으로 그칠지 모른다. 큰 물살을 끌고 오기도 하고, 궂은 날씨나 큰 비를 품고 있을지도. 나의 바람은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도 흔들지 못한 채로 그저 홀로 불다가 그칠지도. 그럼에도 시작해 보려 한다. 주저앉은 마음을 다시 세운다. 의기소침해진 문장을 꾸역꾸역 읽고 채운다. 나는 약하지만 그런 채로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완성할 수 있으니까. 부러움으로 부끄러움만 적다가 마치고 싶지는 않아 좀 더 나아지려는 나로 살기로 한다. 다시 마음을 다지며 책을 든다.
당신의 책을 읽고 나의 '어림'을 다독이고 싶어졌다. 충분치 않아도 잘 다독이고 다듬어 문장을 쌓고 채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박연준 작가님의 '소란'을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