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 첫날. 내일이 오늘이 되었다. 어젯밤에는 종소리를 듣지 않았고, 새해의 복을 빌지도 않았다. 물론 일출도 보러 가지 않았다. 늦게 일어나 아침을 시작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의 시작.
2021년과 다를 것 없는 2022년의 하루. 마지막과 다르지 않은 시작. 물론 차이도 있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집과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 유목민처럼 짐을 지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그리고 어디에서건 나를 위한 자리를 찾는다. 하지만 설렘보다 차분함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1월 1일. 12월 31일과 다르지 않은 출발. 일어나 씻고, 검색으로 찾은 식당에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기 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장소로 향했다. 오늘은 원하던 자리에 가고 싶었다. 걱정이 앞섰다. 혹여 영업을 하지 않을까. 자주 쉬고 종종 놀고 있다는 주인장의 말을 미리 읽어둔 터라 불안했다. 찾아간 카페는 다행히 문을 열었고, 나는 잘 도착했다.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늘 사진으로만 보던 곳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자리. 여행을 하며 일렁이던 생각들이 가라앉았다.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공간을 꾸린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작은 물건, 큰 가구. 크기와 모양이 모두 다른데 다들 같은 소리를 내는 것 같다. 각각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슬며시 목소리를 내려던 나의 마음이 다시 조용해졌다. 가라앉은 생각을 들여다본다. 한 꺼풀씩 벗겨낸다.
2021년 12월 31일. 2022년의 계획을 세워야 하나 고민했다. 늘 계획과는 먼 삶이었다. 내일을 준비하기보다 오늘에 대처하거나 닥치는 일에만 열중했다. 한 치 앞의 일을 해치우며 사는 삶에 가까운 시간. 대비하거나 해결하기보다 치르는 일에 가까운. 주로 즉흥적으로 임하고,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다 보니 체력 소모가 컸다. 급제동, 급발진, 급선회. 사는 날 동안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 많았다. 눈앞에 닥치는 일에 자주 다치고 많은 것을 닫았다. 나이가 들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고, 오히려 쉽게 포기하는 일이 잦았다. 체력도 감정도 쉬이 닳았다. 그렇게 지나온 한 해 동안 잃어버리고 버려둔 것들이 떠올라 좀처럼 여행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물론 텅 빈 몸뚱이로 자리를 옮겨 다니는 일도 버거웠다.
도착한 자리에 앉아 창 밖으로 보이는 열매를 바라본다. 빛을 받아 더욱 색이 진해졌다. 겨울에 맺히는 열매. 머릿속에 맺히는 생각들. 손을 뻗어 주렁주렁 달린 속 없는 열매를 딴다. 가지가 비었다. 빈 가지에 생각이 솟는다. 사방으로 뻗으려는 가지들을 갖고 2022년의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큰 일을 꾸리는 것은 내게는 아직 이르다. 당장 내일이 오늘과 조금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 31일에는 머리로만 했던 일을 1일에는 몸으로 할 수 있도록. 2021년까지는 오래 떠돌고, 늘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떠돌다가도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던 2022년에 나는 다다랐다. 여전히 비틀거리고 짐도 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고 있던 짐을 내려둘 자리를 찾을 거라 믿고 있다. 오래 걸렸지만 그토록 오고 싶던 자리에 도착해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지금처럼.
나의 짐을 내려 둘 집이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나를 담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그곳에서 자주 쉬고 종종 놀면서 2022년을 보내고 싶다. 신호등도 보고, 좌우도 살피면서 급하게 멈추거나 방향을 틀지 않고 도착지에 가면 좋겠다. 물론 꼭 목적지까지 가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그저 가는 길에 잃어버리거나 버려야 하는 것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다다랐을 때에 스스로가 좀 덜 비어있도록. 계속 채우고 보살피며 해를 지나기를.
따듯했던 커피가 마지막 몇 모금을 마실 때에는 차가웠다. 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앉은자리 오른편의 큰 창 너머로 여전히 빛을 받아 색이 진한 열매가 있다. 추운 계절에 열리는 열매. 오늘까지도 유목민인 채로 찾은 이곳에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고 싶다. 무거운 짐도 없이 속이 찬 열매를 맺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