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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r 18. 2022

두 번의 아침

바람이 많았다. 조용히 깨어나 낯선 동네를 걸었다. 거칠고 소란스러운 바람이 몸통을 울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도 않고 겉옷만 걸치고 나와 차가운 바람이 더욱 깊이 느껴졌다. 벌어진 옷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피부 아래까지 닿는 것만 같았다.


작은 마당을 나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손에는 카메라를 쥐고, 옷 주머니에는 혹시 몰라 필름을 챙겼다. 대문 앞을 나오면 보이는 큰 야자수 잎이 세게 흔들렸다. 바다가 지근거리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바람에 스치는 잎들이 마치 밀려오는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아, 내가 지금 사방이 바다인 섬에 있구나.'


바람이 많은 온통 바다인 곳. 까만 돌이 가득한 곳. 귀를 채우고, 몸을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도로까지 나왔다. 날이 맑아 저 멀리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 보였다. 꼭대기는 하얗게 눈으로 덮인 곳. 이 일정의 끝자락에서는 저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고 다짐하고 떠나온 여행이었다. 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었다.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갔다.


이번 숙소 직전에 묶었던 곳에는 바로 앞에 바다가 있었다. 일찍 눈을 뜬 아침이면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로 향해 걸었다. 옅게 풍겨오는 바다 내음을 맡으면서 쓸쓸한 풍경의 동네를 걷다가 다시 따듯한 방으로 들어와 모자란 잠을 더했다.


이번 산책은 바다가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걸었다. 걸음을 옮기는 주변에는 지난 계절 동안 할 일을 마친 비닐하우스와 밭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의 파도소리를 대신하는 거친 바람. 두어 정거장 거리를 걸었다가 다시 따듯한 방으로 돌아왔다. 마주쳤던 동네 사람들은 어느새 다 사라져 있었다. 온기가 도는 침대에 다시 누워 짧은 잠을 청했다. 아침을 두 번 맞이하는 것 같은 하루.


낯선 여행지에서 일어나자마자 하는 오전 산책은 그 장소를 익숙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 여행하며 급히 이동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둘러보게 하고, 서둘러 걷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면 종종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동네 산책을 한다. 그런 여유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잘 가질 수 없으니 말이다. 생활을 이어가는 곳에서는 짧은 산책도 시간을 내어야 가능할 때가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다 보내면 아주 잠깐의 쉼도 갖기 어렵다. 그래서 여행을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일상에서 거리를 두어야만 가질 수 있는 여유.


아침을 두 번 가질 수 있는 기회.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다시 돌아보면 온전히 혼자 나를 위해 보낸 시간으로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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