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방 안의 코끼리를 알아챘다

25년 9월 11일의 감정

by 하지


학교 화장실 근처에 너무 아름다운 길이 있어서, 사무실로 돌아오다 말고 샛길로 빠졌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나뭇잎으로 뒤덮인 길을 걸어 올라가니, 어느새 이렇게 연결되는 줄 몰랐던 건물에 도착해 있었다. 새로운 발견에 들떠서 둘러본 주변 풍경은 설레고 아름다웠다.

위를 올려다보니 푸르른 하늘색도 너무 예뻤다. 어떤 색을 섞어서 그려도 저런 느낌은 안 나올 것 같아. 가을이 되니 하늘 얘기를 많이 하게 된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마음은 커다란 돌덩이가 앉은 듯 무거웠다. 무엇 때문인지 짐작은 됐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인정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하루 종일 짧은 메모만 많이 남겼다.


퇴근길에는 몸도 마음도 지쳐서 지하철 문에 붙어있는 모기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붙어 있었지? 왜 가만히 있을까? 퇴근 시간대라 사람이 많아서 지금 물기 시작하면 피를 많이 빨아먹을 수 있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하고 피곤했다.


스터디를 하면서는 목에서 쇠 맛이 나고 몸이 뜨거워져서 컨디션이 더 좋지 않았다. 일주일 넘게 지속되는 감기가 독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스터디가 끝나고서도 괜히 눈물이 나오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서 메모장에 '나는 지금 아프고 외롭고 슬프고 무섭다. 하지만 이건 지나가는 감정일 것이다. 그래야 한다.'라고 적었다.


그러고 하루 중 가장 침착해졌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무엇 때문에 슬프고, 힘들고, 무서웠는지 드디어 인정했을 때였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서 그 사실을 아끼는 사람에게 얘기해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그 상황과 흔들릴 관계,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어 현실로 만들고, 앞으로의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를 책임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동안 아파서라고만 생각했던, 최근에 잠을 잘 못 이루고 이유 없이 힘들었던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며칠 혹은 몇 주 내내 방 안의 코끼리처럼 그 주변만 배회하면서 부인해 왔던 것이다.


선택을 앞두고 이전만큼 주변에 의견을 묻지 않았던 이유도 납득이 갔다. 내가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답을 얻을 단계는 지났다. 결과가 두려워서 피하고 있었지만,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용기는 그 두려움을 마주 볼 때에만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고요하고 침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어렵구나. 나는,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다루기 어려운 문제나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구나, 방 안의 코끼리 주위를 한동안 배회하면서. 그래도 이제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다.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거의가 아직 닥치지 않은 일 때문이다. 예기 불안에 휩싸여서 '지금'을 잊을 때에.


사실 해결 방법은 담담하게 그것을 경험하는 것 밖에 없다. 준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며, 응원하는 방법뿐이다.

왜 빨리 못하냐고 스스로 다그쳐봤자 자책만 섞이고 별 도움이 안 된다. 머리로는 그걸 알아도 매번 늦게서야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준 나 자신에게 고마웠다.


뭐든 너무 잘하려고 애쓰거나 몰아붙이지 말자, 불완전한 선택이라도 일단 해보고 유연하게 대처하자.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그냥 받아들이자.

그렇게 지금 감정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 조금 더 담담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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