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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Feb 02. 2023

콩트 쓸모없는 공처가

< 쓸모없는 공처가 >


이종섭 


솔직한 말이지만, 나는 주방 일을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전혀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기껏 해야 식사 후 식기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는다거나 내가 마실 커피 또는 먹을 라면 한 개를 끓이는 정도니까 그것을 가지고 양심상 주방 일을 도왔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내가 외출한 사이에 초인종이 요란히 울려 나가 보니 아내가 다니는 교회의 여성 신도들이 무려 4명씩이나 몰려왔지 뭡니까. 아내가 권사인지 권세인지 하는 직책에 봉해졌으니 축하 겸 인사 차 들렸다는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손님들은 몰려왔는데 당사자는 나가고 없으니 이걸 어쩌나 하고 망설이며 그 여성 신도들을 쳐다보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세분은 그래도 아주머니지만 부끄러워하는 듯하면서도 제법 상냥하게 생겼던 지라 그냥 무조건 가라고는 할 수 없고, 하는 수 없이 내 마음 나도 모르게 들어오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들은 남자 혼자 있는 집이라 그냥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서로 눈치 보며 그 예쁜 입으로 쏙닥거리더니 그럼 잠깐 예배나 드리고 간다며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론 그렇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대접해야 할 줄을 몰라 조금은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그깟 것 가지고 망설여서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거실로 안내하고는 차를 끓이려 주방으로 갔습니다. 녹차라도 한 잔씩 대접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다음 컵을 꺼낸 후 녹차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방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도대체 어디에 녹차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한 참을 헤매면서 뒤지다가 보니 찬장 맨 꼭대기 높은 곳에 녹차라고 쓴 사각 상자 두 개가 포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당연히 위쪽의 상자에 든 것을 먼저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을 뻗어 차 봉지를 여러 개 꺼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녹차 주머니가 생각보다 조금 큰 것 같았습니다. 나는 새로 나온 신제품 녹차인 것으로 생각하며 컵에 집어넣었습니다. 요즘 녹차가 너무 싱거워서 한 개씩 넣으면 맛이 없다는 아내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라 한 컵에 봉지 두 개씩을 넣었습니다. 컵이 작은 것도 아닌데 차 봉지가 꽤 큰 데다가 두 개씩 넣으니까 컵의 3분지 2 정도 높이까지 꽉 찼습니다. 그리고 주전자의 물을 팔팔 끓여 들여 부었습니다. 물론 나야 녹차 보단 커피를 즐기니까 커피도 한잔 맛있게 탔습니다.


내가 요즘 하는 일도 별로 없이 요 모양 요 꼴이지만 그래도 신사는 분명 신사인데 숙녀들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지라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찻잔을 쟁반에 올려 정성스럽고도 조심스럽게 날라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탁자 위에 놓았습니다. 아, 이렇게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인들과 함께 앉아 차를 마셔본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하도 오래돼서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차는 마시지 않고 성경책인지 찬송가책인지를 펼치더니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구절을 읽고는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나도 따라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그냥 눈감고 하는 척하였습니다.

잠시 후 기도가 끝나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꺼내면서 차를 한 모금씩 마시더니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녹차니까 설탕을 넣지 않았을 뿐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고 금세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므로 별 탈 없이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여성들은 이러한 나의 심정도 모른 채 함께 교회에 나오라는 둥 별 관심 없는 얘기만 한참 하다가 차도 별로 마시지 않고 일어나더니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베란다로 가 한바탕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에 찔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데도 왠지 불안하므로 숨죽이면서 가보니 여태껏 수돗물을 틀어 놓고 왜 잠그지를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베란다에 송아지보다 조금 작은 엄청 커다란 라브라도레트리버종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그 개는 교육을 받다 말아서 목이 마르면 입으로 수도꼭지를 틀은 후 물을 마시지만 마시고 난 다음 잠글 줄을 몰라 자주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수돗물 값이 많이 나옵니다. 예쁜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잠깐 관심을 두지 못했더니 그만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잠시 후 큰소리가 잠잠해지는 것 같아 눈치를 보며 손님들이 왔다 간 이야기를 했더니 찻잔을 치우며 또다시 한마디 하였습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뭘 대접 했수?"

"뭐, 그냥 간단히 녹차 한잔씩 대접했지."

"녹차? 이게 녹차요?"


아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더니 또다시 점잖게 한마디 하였습니다.


"이젠 노망이군... 이게 녹차요, 영감?"

"노... 녹차... 그렇지."

"옉 끼 여보슈, 이게 보리차지 녹차요? 이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군, 쯧 쯔..."

"보, 보리차? 아이쿠, 이걸 어쩌면 좋으냐!"


어쩐지 차를 마실 때 표정이 이상하다 했더니만... 생각해 보니 아마 그 포개진 상자의 위쪽에 든 것은 보리차였고 그 밑의 상자에 든 것이 녹차였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찻잔을 치울 때 오늘따라 떨그렁 거리는 소리가 요란히 크다는 것을 느끼고는 거실에 앉아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는 거실 끝에 주저앉아 나를 쳐다보는 개 '숙자'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내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냐, 너 보다도?"


개는 아무 말 없이 코를 벌렁벌렁 거리며 계속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결코 부인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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