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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Jan 13. 2023

콩트. 꽃게탕, 그 엄청난 맛의 비밀

     

저녁 8시에 모처럼 처갓집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실업자 집이라 살림살이가 변변치는 않았지만, 아내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없는 돈을 들여 제법 값이 나가는 큼지막한 스테인리스 냄비 하나를 사다 그에 걸맞게 알이 통통 밴 꽃게를 아주 먹음직스럽게 끓였습니다. 장가도 안 간 조카가 강원도 물맛 좋은 고장에서 순수 국산 콩으로만 만든다는 된장대리점을 한다기에 특별히 주문하여 산 것을 양념과 함께 버무려 끓이고 또 끓였습니다. 다 끓었을 때쯤 슬그머니 다가가서 맛을 보니 캬~, 냄새도 구수한 것이 둘이 먹다가 아내가 죽어도 모를 만큼 일품이었습니다.

역시 즐기고 잡아먹는 것은 암컷이라야 제격이고 꽃게탕엔 뭐니 뭐니 해도 된장을 듬뿍 넣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인가 봅니다.     


아내는 꽃게탕 냄비를 싱크대 아래에 내려놓은 다음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李면수 몇 토막을 튀기더군요. 계속해서 침이 꼴까닥 넘어가는 것이 상상만 해도 오늘 저녁은 모처럼 포식을 하게 생겼습니다. 전기밥솥에는 잡곡밥이 다 익었다는 듯이 멜로디도 상쾌하게 삐리릭 삐리릭~ 소리를 내었습니다. 아마 그동안 부족했던 영양은 충분히 보충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란다의 숙자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난리 법석을 떱니다. 아침식사 후 설사를 하기에 점심을 굶겼었는데, 배가 좀 고픈 모양입니다. 순서야 바뀌었지만 워낙 개를 사랑하는 나는 마음이 걸려 미리 사료 한 바가지를 듬뿍 주었습니다. 초대형견 숙자는 사료와 물, 커피만 먹도록 습관이 돼서 그 외의 사람 음식이라고는 아무것도 먹질 않습니다.     


다섯 시가 되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벌써 모이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 경비실이었는데, 칠순이 다 되신 이웃 노인께서 승용차를 후진하다 하필 주차장에 세워 놓은 아내의 차를 들이받았으므로 급히 나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뭐를 하려면 꼭 결정적인 순간에 사고가 터지고 마는데, 아내와 함께 나가 보니 뽑은 지 1년도 안된 아내의 새 차 엉덩이 부분을 왕창 찌그러뜨렸습니다. 아내야 살이 많이 붙었으니 튼튼하다지만, 나처럼 뼈만 남은 차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점잖으신 노인은 사과하시자마자 지금 당장 고치러 공장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오후 5시밖에 안되었으니까 빨리 가면 견적을 뽑고 수리를 의뢰할 수 있으므로 노인과 아내는 공장으로 출발하고 나는 집으로 다시 들어와 문을 여는데, 순간...    


아! 나의 사랑스런 친구가 또 무지막지한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새 끈이 풀려서 자유, 자유를 부르짖던 숙자는 미친 광녀처럼 화분을 쓰러뜨리고 신문지를 어지럽히면서 그것도 모자라 그 아까운 꽃게탕 냄비 뚜껑을 멀찌감치 내팽개치고는 여기저기에 찔끔찔끔 설사를...

당연히 꽃게탕에도 많이는 아니지만 그것이 두어 스푼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안 봤으니 살짝 걷어 내고 모른 척 한 번 더 끓인 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조금 과장을 하자면 평생을 양심 하나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것 참 보통 헷갈리는 대형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머리칼이 삐쭉 서는 것을 느끼면서 황급히 개를 거실 건너편 베란다에 묶어 논 다음, 설사 환자니깐 내일은 꼭 병원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하면서 앞으론 그러지 말라고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바닥을 휴지로 닦고 세제를 뿌려 문지르고 또 문질렀습니다. 다음 냄비차례입니다. 동물을 싫어하는 아내에게 통 사정해서 개를 키우고 있는데 이제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없는 데다가 아까운 꽃게탕도 버리는 방법이 쉽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새로 산 냄비를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하도 난감해서 냄비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흔들어 보았더니 금세 "설사"가 풀어져 진한 된장국물의 꽃게탕 빛깔은 더욱 아름다웠지만, 갖가지 냄새가 뒤섞여 야릇하게 코를 찔렀습니다. 나의 돌 머리에는 아무런 비상대책도 서질 않았지만 어쨌거나 아내가 오기 전에 마무리를 하긴 해야 되겠는데, 우선 냄비를 신성한 주방에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임시로 바로 옆 베란다에 내다 놓고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있으니 모든 것을 다시 사다 놓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상가 전화번호부를 뒤져 꽃게탕 집을 알아냈습니다. 된장을 듬뿍 넣어 미리 끓여 놓으라고 주문 전화를 하고는 할인매장에 먼저 들려 우선 냄비를 사고 다음 꽃게탕 집으로 갔습니다. 아깝게도 무려 반달 치의 용돈을 들여 꽃게탕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늘따라 왜 그리 교통이 혼잡한지 마음은 급한데 차는 더디기만 하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떨리는 마음으로 아파트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습니다. 이상한 공기가 얼굴을 확 감싸는가 싶더니만, 아뿔싸!


시간은 일렀지만 이미 모든 식구들이 밝은 표정으로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아니, 버 벌써 들 왔수?"

"예, 일이 일찍 끝나 걍 달려왔죠. 배도 고프고 먼저 먹었는데 매부도 얼른 드세요. 꺼~억..."     

순간 두, 세 개의 다리에 모든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눈을 한 번 깜~빡한 다음 식탁 위 냄비를 다시 한번 보았는데 틀림없이 그 꽃게탕이 담긴 스테인리스스틸 냄비였고 각자의 사람들 앞에는 그것을 떠먹던 접시가 대부분 다 비워진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간혹 끄르륵, 푸~ 하며 트림을 하거나 입맛을 쩝 쩝 다시는 것을 보니 참, 꽤나 맛있게 먹었나 봅니다.

게다가 아내는 글쎄, 그걸 한 접시를 따로 떠 놨으니 날 보고 얼른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오! 음식은 진정 신성한 것인가?”     


나는 극구 사양하고는 양심이 뜨거워 붉은 낯으로 베란다의 숙자를 바라보는데, 숙자는 아무 죄도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딱! 잡아떼고는, 의리도 없게 코를 벌렁거리며 콧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창밖의 날 저무는 풍경만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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