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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Jan 13. 2023

콩트 < 빗나간 선물 >

콩트 < 빗나간 선물 > 

         

나에게 날짜가 무슨 소용이며 시간이 무슨 소용입니까. 할 일 없이 놀고먹는 주제에는 그런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궁금할 뿐 그냥 심심해서 시계를 들여다보면 아하, 아침이구나. 또는 아하, 이 달도 얼마 안 남았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던 작년 어느 날 무심코 날짜와 요일까지 들어있는 시계를 들여다보니 바로 내일이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게 웬일이란 말입니까? 결혼 후  몇 십 년간 단 한 번도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의 생일을 기억해 본 적이 없는 나인데, 무슨 천지가 개벽을 하려고 아내의 생일이 생각나다니 이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도대체 구분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한편 생각해 보면 요즘 빈둥거리면서 가뜩이나 밉상인 내가 한꺼번에 분위기를 만회할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맞아, 내일이 아내의 생일, 모래는? 모래까지야 뭐 알 것 없고... 후하하핫, 

그래 한 번 놀라게 해 주지 뭐, 쩝쩝..."      


계획을 짰습니다. 비록 머리는 돌 같이 생기고 실제로도 돌처럼 잘 굴러가지도 않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생각하고 짜내다 보면 아이디어는 떠오르는 법,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일 까지 모르는 척 딱 잡아떼고 있다가 그렇지, 갑자기 파티를..."     

 

이웃에 사는 처제는 워낙 바쁘니깐 그만두더라도 처조카 꼬맹이들에게는 전화를 걸어 내일 아주 좋은 날이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학교 끝나자마자 이리로 달려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님이 둘째 형님 댁으로 가야겠으니 시골에 차를 가지고 내려오라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그냥 허사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든 것을 파출부 아줌마에게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 궁색한 살림이지만 파출부 아줌마를 불러 집안일을 시키고 있는데 꽤 오래 시키다 보니 식구 같이 되어버려서 서로의 생일이며 집안 내력까지 모두 아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내가 잠깐 나간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서 파출부 아줌마에게 귓속말로 부탁했습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시죠? 이따가 케이크 하고 꽃바구니가 올 테니 오늘은 특별히 맛있게 식사도 하고 가세요. 집사람한테는 내가 없더라도 오늘 만큼은 즐겁게 지내라고 하구요." 

"아유, 죄송해라... 미안해서 어떡해요, 괜찮은데.. 호호호..."      


도대체 얼굴까지 붉혀 가면서 뭐가 미안하고 괜찮다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부탁을 하고는 백화점에 들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내가 비록 오래 살다 보니 할망구가 되었을망정 여자는 여자임이 분명할뿐더러, 여자에겐 속옷이나 화장품이 최고의 선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있는 용돈과 비상금까지 다 긁어모아 깊은 속옷, 그것도 조금 야하게 분홍색으로 사서 예쁘게 포장한 후 꽃집에 들러 꽃 한 다발을 주문하여 그 선물과 함께 낮 5시 정각에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참, 갈 때 케이크도 큼지막한 것을 하나 사가지고 가라면서요. 그리고는 기뻐할 아내의 표정을 생각하며 나도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때 꽃집에 온 손님인듯한 아가씨가 자기 보고 웃는 줄 알고는 별꼴이냐는 표정으로 쳇! 하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어 시골로 달려가서 어머님을 태워 둘째 형님 댁에 모셔다 드리고는 다시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즐거워할 아내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아파트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공기가 무척 탁함을 느꼈습니다. 피 같은 용돈으로 주문했던 꽃다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조카들도 별로 즐거운 기색이 없었고 아내는 힐끔 처다 보고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쉬며 앉아 있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손발을 닦고는 거실로 다시 나와 처조카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애들아, 오늘같이 즐거운 날 많이 먹어라."      


또한 아내에게도 말을 했습니다. 모처럼 가슴을 쩍 펴면서 말입니다.     

 

"함께 먹지, 파티는 재미있었어?"      


순간 아내는 먹다만 커다란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들더니 갑자기 나에게 냅다 던졌습니다.      


"옜다, 혼자 많이 쳐 먹어라!" 

"으악! 무 무슨 짓이야, 그리고 뭐? 쳐, 쳐 먹어라?"      


항상 평화를 사랑하며 무방비의 상태로 앉아 있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날벼락을 맞고는 얼굴에 케이크 크림을 흠뻑 뒤집어썼습니다. 나는 온통 머리카락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떼어 내는데, 아내는 휙 하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어휴, 이게 무슨 난리람... 애들아 무슨 일이 있었니?"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모가 왜 저러냐?" 

"이모부, 그것도 몰라요? 어제 이모 생신 때 파티 안 했죠? 그러고 선 아줌마한텐 파티해주고 꽃다발에다가 속옷 선물까지 챙겨 주는데 화 안 나겠어요?" 

"무 무슨 소리야, 오늘이 이이 이모 생일이야. 5월 20일, 그건 이모 선물이라구." 

"오늘이 무슨 20일이에요? 오늘은 21일이라구요, 아줌마 생일이래요." 

"엉? 이 시계의 날짜 좀 봐라, 분명히 20일이잖니..." 

"쳇, 그 시계 요일하구 시간은 맞는데 날짜는 틀리네요, 오늘 분명히 21일 이라구요. 저 달력 보세요."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이상한 예감... 가만히 생각하니, 오호라... 지난 4월 달은 30일까지 밖에 없는데 그러고 보니 시계 날짜를 31일에서 하나 넘겨주어야 하는 건데 그걸 안 했던 것 같았습니다.      

"아이쿠 이걸 어째...그럼 그 분홍색 속옷하고 꽃다발까지 아주머니가...? 

에구 이 돌 머리야, 난 어쩌면 좋으냐... 참, 그리고 피 같은 내 용돈, 아까워라. 아흑..."    

  

잠시 후 애들이 모두 가고 난 후 한탄하며 나 혼자 남아 있으니 하늘이 노릇노릇하고 아무 정신이 없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파출부 아줌마였습니다.     

 

"아유, 죄송해요, 급히 오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브래지어 팬티 딱 맞구요, 속옷 너무 예뻐요. 꽃다발 까지 어쩜 여자 맘을, 호호호...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내일 뵐 께요. 안녕히 계셔요." 

"아니 뭐, 그 그 정도 갖구, 네 네 그 그럼..."      


얼떨결에 통화를 마치고 생각해 보니, 날로 멍청해가는 나의 머리는 도저히 고칠 방법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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