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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Jan 27. 2023

콩트 노숙자 친구

< 노숙자 친구 >

          

요즘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성은 노, 이름은 숙자. 그래서 노숙자인데 내가 별명을 지어줬지요. 게으르긴 해도 반드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수염을 깎지 않아서 무척 깁니다.

그는 항상 나하고 함께 있기를 좋아합니다. 나하고는 아주 친하기 때문인데, 목욕한지가 한 달이 넘어 냄새가 조금 고약하므로 오늘 나의 욕실로 데려와 목욕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조금은 기분이 좋을 듯 하건만 나의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평생 절대 웃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웃을 때 빠져야 할 배꼽도 필요가 없어 달고 있질 않습니다.


베란다에 묶여 있는 그는, 첨엔 무척 불만이 많았지만 요즘은 잘 순응하고 있는 아주 착한 놈이긴 합니다. 밤이면 반드시 자기의 침구를 가지고 다니는데 날씨가 추우면 거실 한 쪽 귀퉁이로 침구를 끌어 와서 자고 따듯할 때면 베란다로 가지고 나가 거기서 잠을 잡니다.

물론 밥은 내가 주어야 하지만 나는 원래 공짜를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므로 절대 배가 고프다고 그냥 주는 법은 없고 반드시 뭐라도 해야 밥을 줍니다. 그러니까 신발이라도 하나 던져주고 집어 와야만 밥을 준다는 사실을 그는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집 베란다의 수돗가엔 노숙자의 밥그릇, 물그릇, 침구, 슬리퍼 그리고 또 하나의 그릇이 있는데, 그 녀석은 배가고파 참기가 힘들면 신발을 물고 끙끙대며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의 눈초리를 보니깐 나를 꽤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잠을 자다 내가 거실로 나오면 아무리 졸려도 쳐다보긴 하는데, 옛날의 존경하던 눈초리가 아니고 마치 감시하는 눈초리 같습니다. 베란다의 슬리퍼도 어느샌가 갈기갈기 찢어 놓았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분풀이가 분명합니다. 물론 그 녀석의 씨족이 별로 나쁘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아는데, 조상 대대로 무슨 대회인지 나가서 입상한 경력이 족보에 화려하게 올라와 있으므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아무리 실업자라 해도 인간이고 자기는 조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디까지나 짐승인 까닭에 존경은 아니라도 최소한 무시는 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어떤 때는 일어나기는커녕 그냥 누워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고는 게다가 방귀도 방귀 나름이지 글쎄 풍! 하고 콧방귀를 자주 뀌는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사람 같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그에게 잘못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지 딱 한 가지 짐작이 가는 것이 있긴 있습니다. 뭐냐면, 친구면서 식구처럼 되다 보니깐 내가 먼저 밥을 먹고 나면 반드시 그에게도 밥을 주는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느 날 손님을 만나러 함께 야외 커피숍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하는데 자신의 주제를 잊어버리고는 자꾸만 커피를 달라고 손으로, 아니 참 그는 손도 발이므로 앞발로 내 무릎을 툭툭 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른 척하고 있으니까 자기도 달라는 듯 무척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고 이에 마음씨 좋게 생긴 그 손님이 그걸 보고는 신기한 듯 마시던 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주니깐 아주 맛있게 잘 먹었는데 그 때부터는 커피 맛을 알아 가지고 반드시 자기도 밥을 먹고 나면 커피를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밖으로 나가 건물 앞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마시려면 사람의 숫자보다 하나 더 추가하여 뽑아야 합니다. 숙자도 함께 한 잔 해야하니까요. 세상이 말세다 보니깐 그것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친구사이에 그 정도는 감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건 이해할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과 며칠 전이었습니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운명의 날이었지요. 어느 여성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냐면...,


마누라한테도 알려 주지 않는 건데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고, 하여튼 만나자고 하면서 개를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만나는 장소는 그녀가 사는 동네의 애견카페인지 뭔지로 정하여 나갔습니다. 맹세코 정말 생전 처음입니다. 하지만 커피를 그녀가 사겠다고 했는데 나도 염치는 있는지라 숙자의 몫까지 시켜 달랄 수는 없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시켜주는대로 마시면서 모처럼 제법 화기애애하게 가끔 웃어도 보면서 얘기를 하였습니다. 공짜 커피라 그런지 무척 맛도 좋았습니다. 그녀는 뒤축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땅에 끌릴락 말락 하는 긴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실업자의 눈이었지만 그녀의 몸매 꽤 날씬하며 화려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 숙자는 옛날에 하던 버릇으로 자꾸만 나의 무릎을 앞발로 툭툭 쳤으므로 나는 그 뜻을 알아채고는 눈치껏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티스푼으로 한 스푼씩 바닥에다 뿌려 줬습니다. 그러다 실수로 그녀의 치맛자락에도 조금씩 튀겼지만 눈치를 챌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참 시간은 빨리도 흘렀습니다. 어느 새 날은 저물어 마누라의 얼굴 허상이 눈앞에서 왔다리갔다리하는데 일어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아쉽기는 해도 가정의 평안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익히 깨닫고 있는 내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일어서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도 함께 일어섰습니다. 레디 퍼스트라고 여성이 먼저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그녀가 먼저 나가려는 순간...

     

아~,

     

이걸 어쩌나... 몰래 슬금슬금 커피가 묻은 치맛자락을 핥고 있던 숙자는 그녀 따라 움직이는 치맛자락을 놓칠 새라 콱 물어 당기니 걸어가려던 그녀는 그만 순간적으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숙자는 그녀와 같은 여자지만... 아니 참 같은 여자는 아니고 그녀는 여자, 숙자는 암놈이지만 1년 가까이 된 대형견 골든 리트리버이므로 무는 힘은 그녀보다 훨씬 셉니다. 그러니 방심하던 그녀가 넘어질 수밖에...

그런데 더욱 중요한건 그게 아닙니다. 그 옷이 별로 비싸 보이지도 않았지만 설령 비싸다 해도 그렇지 차라리 찢어졌으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이게 일이 잘못되려니까 옷은 안 찢어지고 치마가 벗겨져 버렸습니다. 아, 아아아흑...


난 그만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그녀가 꽈당 넘어지면서 다는 아니고 엉덩이, 아니 말은 점잖게 해야 하므로 힙, 힙 아랫부분까지 거의 다 치마가 내려왔는데 가장 화려할 것 같은 팬티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노, 노ㅍ....

사람들은 꽈당 소리에 놀라 쳐다보는데 이걸 어쩝니까? 다 탄로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절체절명의 상태에서도 목숨을 걸고 숙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하려는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고 해서, 황급히 허리를 굽혀 그녀의 힙을 가려 주고 또한 옷도 추켜 주려 손을 뻗다가 그만 중심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힙 위에 내 몸 상반신과 양 손이 얹어졌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물컹하니 흠씬 만졌다고 해야 되겠지요. 피부끼리 접촉한 감촉도 꽤 좋았던 것만은 속일 수없는 사실이고...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쪽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당연히 수근 덕 거리기 시작 했습니다. 어떤 이는 킥킥 대며 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넘어졌으면서도 내 손을 탁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치마를 추켜올리면서 일어나 한 마디 하는데 어디를 만져욧! 하고 사람들 많은 데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결국 겸연쩍은 표정으로 피씩 웃기는 했지만 나는 금방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파렴치한 못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정말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여성의 토실한 힙 한 번 만지게 된 대가를 꼭 따질 수는 없는 거지만 참 결코 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페의 문을 나서면서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면서 흥! 하고 가 버렸는데 마음이 연약한 나는 한 마디 변명도 못했으며 한 번 더 넘어질 수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도 뻥끗 못했습니다. 결국 망신만 당하고 돌아왔고, 그래서 그 이후로는 숙자가 아무리 조르더라도 커피를 주지 않고 있는데, 이때부터 나를 보는 이 친구의 눈초리가 이상해 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한 건, 그 사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그녀에게서 단 한 번의 전화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요즘도 그 사건이 억울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가끔 잠을 못들 때가 있습니다. 신문과 잡지에서 가끔 보아왔으므로 별로 놀랄 일은 아니라지만, 그걸 입지 않는 여성이 왜 존재하는 것인지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우리 여성 여러분!

날로 힘들어지는 국내의 섬유산업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그것만은 꼭 입고 다니시기를, 오늘 나는 강~력히! 권고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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