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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Feb 10. 2023

시 < 고라니의 눈 >

< 고라니의 눈 >


이종섭


멍청하도록 맑은 눈을 가진 고라니는 하늘아래 그어진 국경을 인식할 수 없었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눈을 감은 적이 없는 것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조상들의 유언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혀는 한 번도 남을 찔러보지 못했지만, 이유도 없이 눈치만 보며 밤낮을 쫓겨 다녀야만 했다.


두 눈은 쉴 새 없이 세상을 의심했지만, 푸른 채소밭이 하늘보다 무서운 가면 쓴 평화라는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우려하던 산들바람이 몇 차례 경고를 보냈지만, 여린 풀잎처럼 순진하게도 그 뜻을 눈치채지 못했다.



허기진 주둥이가 단지 몇 잎의 채소를 얻기 위해 금단의 선을 넘었다.


달빛에 비쳐지는 초록의 유혹에 눈길을 빼앗기는 순간, 압축되던 긴장이 잔악하게 발광하며 찰나보다 빠른 형벌이 날아들었다.


사방을 망보던 큰 눈이 있었지만 천벌보다 무서운 음흉한 문명 앞에 두근거리던 가슴은 여지없이 뚫려버리고, 밤하늘 별빛마저 두 눈에 빨려 들어 시야는 빠르게 흐려져 갔다.


공포에 질린 짙붉은 열기가 도랑물처럼 새어나가고, 비명에 튀어야 할 근육들은 말뚝처럼 뻣뻣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겁먹은 고라니는, 숨이 멎을 때까지도 끝끝내 경계의 눈만은 감지 못했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눈을 감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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