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_04

베트남인들의 한국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1부. 이상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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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이 [제1부. 이상한 전쟁]의 이야기는 실화를 소설기법을 통해 조금도 거짓없이 그대로 기록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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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계곡에 울리는 베트콩의 진군가


일단 비상통로를 이용하여 굴속에 숨어서 사흘을 보낸 위원장과 역매복조 베트콩 대원들은 한국군 부대가 철수한 것을 확인한 후 하루를 더 묵은 다음, 그로부터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본거지로 돌아와 또 다시 축배의 환호성을 올렸다.


“베트콩(Vietcong) 만세,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호찌민(Ho Chi Minh) 만세!”


이어 위원장은 비장한 각오의 눈빛을 번뜩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용감한 전사들이여!

우리의 동지들이 흘린 고귀한 피와 땀으로 말미암아 소총과 기관총 몇 자루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는 첨단 공격헬기와 막강한 화력을 갖춘 한꾸웍 놈들에게 일당백, 일당천의 연전연승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동지들의 목표이자, 베트남 전 인민들의 염원인 민족 해방의 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오늘 상부에서 하달한 정보에 의하면 미군과 한꾸웍 군은 얼마 안 있어 이 땅에서 철수한다고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는 암암리에 우리에게 협조하고 있는 남베트남(월남) 민병대에게 인계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 땅에 외세 없는 진정한 민족의 해방의 날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기뻐하라 여러분, 나의 동지들이여! 민족해방을 위해 다시 한 번 외쳐보자. ‘베트콩 만세,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호찌민 만세! ”


만세를 외치고 난 위원장은 여러 개의 보따리 중 하나를 풀었다. 그것은 월맹(북베트남)의 깃발들의 묶음이었다.


“이 깃발들을 가지고 휴전이 실시되는 날 마을의 곳곳에 꽂아야 한다. 따라서 모두 마을 입구로 가 기다려라. 건투를 빈다.”


며칠 후 베트콩들이 깃발을 가지고 간 곳은 청도깨비 부대 주변의 한 마을이었다. 위원장의 라디오 이어폰에서는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 등 4자 대표가 전쟁 종식을 위한 휴전협정에 조인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소총 등 개인화기를 제외한 모든 한국군의 중장비는 지체없이 베트남 정부군과 베트남 민병대에게 인계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그 병기들의 대다수는 다시 베트콩과 월맹군에게 인계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중무장된 베트콩들이 거꾸로 한국군을 포위한 꼴이 되고 말았다.

도깨비부대의 주변 마을 곳곳에는 이미 월맹(북베트남)의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공격에 대한 전의를 시시각각 불태우고 있었다. 슈까이망망 계곡에서는 진군가 (進軍歌 : Tiến Quân Ca)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돤 콴 비에트남 디 ~

청 롱 꾸우 쿠옥 ~

부옥 찬, 돈, 방 뜨랜 두옹 갑 겐싸 ~

꼬 인 마우 치엔 땅 망 혼 누옥 ~

성 응오아이 싸 첸 쿡 콴 한 까. ~

.....

베트남의 군대여, 전진 하여라!

조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함께 하리니

우리들 바쁜 행진, 높고 험준한 길로 걸어가노라.

우리의 국기는 승리의 붉은 피, 조국의 영혼이 깃들어져 있나니

총성이 우리의 행진곡과 함께 울려 퍼지는 도다.

.....”


1번 국도를 이용하여 나트랑(나짱) 쪽으로 철수하려던 백마 28연대의 병력은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위태위태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29연대도 베트콩의 습격을 받아 관리하고 있던 목교(나무다리)가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29연대 1대대장 Y중령이 상황 파악을 위해 일부 병력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결과는 베트콩의 기습으로 5명의 병사들과 함께 현장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 전부였다. 이 사건 소식은 발 빠른 종군기자들에 의해 고국까지 전해져 각 신문마다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대서특필 되었으며, 전 국민이 함께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백마 29연대 Y중령, 휴전 한 시간 앞두고 장렬히 전사!”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사단장은 28연대장에게 육로철수를 포기하고 수송기를 이용한 항공철수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장병들의 귀국박스는 모두 폐기하고 비행기로 병력만 태워 철수하라. 상황이 좋지 않아 육로를 이용한 철수는 너무 위험하다.”

“(사단)장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저와 우리 지휘관들은 A박스건 B박스건 명령에 따라 모두 때려 부수겠습니다. 그러나 장병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역만리 이곳에 와서 피를 흘렸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 흘려 싸운 병사들은 몇 푼어치 안 되는 귀국박스마저 포기하고 어떻게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박스 안에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날을 위해 한 끼 두 끼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을 절약하고 참아가며 틈틈이 모아 두었던 C레이션 같은 피눈물 나는 소품들이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강 대령, 귀관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는 더 이상 모험을 할 수 없지 않는가? 나도 귀국박스는 만들지 않았소. 가슴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장님! 장병들은 여지껏 조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명분에 따라 남의 나라를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왔습니다. 하지만 장님,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서 다시 돌아왔노라!’며 가족 앞에 내놓을 장병들의 자그마한 선물을 지키고 가져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지막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수송트럭을 보내주십시오. 비록 중화기는 빼앗겼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당당하게 혼바산 지역 봉로만 고개를 넘어 1번 도로로 철수하겠습니다.”


이 무전통화 내용은 이곳에 파견 나와 있던 월맹군 정보부대에 의해 도청되었고, 이것은 다시 철수부대에 대한 공격을 맡고 있던 베트콩 지역대장인 인민위원장에게 전달되었다. 인민위원장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승자의 표정을 짓더니 뜻밖에도 공격중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귀사물알(歸師勿遏) 위사필궐(圍師必闕)! 고향에 돌아가려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적의 퇴각로는 막는 법이 아니다. 공격을 멈추고 길을 비켜 주거라.”


이때 부위원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항의하며 나섰다.


“저들은 민족의 원수들입니다. 돈에 팔려온 쥐새끼들을 하나라도 더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제의 물품들이 들어있는 저들의 귀국박스를 탈취하여 헐벗은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무슨 소린가, 부위원장. 지금 감격할 민족해방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 날을 위해 가장 시급히 확보해야 하는 도로가 사이공부터 하노이로 이어지는 1번 국도다. 명분 없는 불필요한 시간끌기는 허영이고 남용이다. 우리는 하루 빨리 민족의 대 번영을 이룩할 그날을 맞이해야만 한다.”


위원장은 살며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상상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문랑국(文郞國)’ 이래 수천수백 년 외세의 침략을 견디어 온 우리의 강한 나라 베트남! 논(삼각형 야자수모자)을 쓰고 해마다 두 번 세 번 같은 씨를 뿌려도 풍년을 이루는 기름진 곡창, 명절 때마다 아오자이를 입은 순박한 여인들이 수박과 진떡으로 정을 나누며 이웃을 사랑하던 평화스런 나의 고장 투이호아, 지금 우리의 용신(龍神) 혼바산이 이 역사적인 현장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치듯 명령하였다.


“지체하지 말고 길을 열어라! 이제 싸움은 끝났다. 도로에 한 치의 파손도 없이 그대로 인수해야 한다. 어서 길을 활짝 열어라! 이것은 우리 베트남 민족이 항꾸웍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가 될 것이다. 베트남 민족의 자비!

언젠가 다시보자, 항꾸웍! 잘~ 가거라, 항꾸웍!”



제2부. 개척시대


9. ‘도이모이’(Doi Moi)를 외치는 평화의 나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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