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_09

베트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2부. 개척시대


16. 인간으로 태어나다


꿈을 꾸는 것인가? Van은 목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말랐다. 머리는 부서지도록 아팠고 일어나려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려 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치고 지친 나머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또 다시 고통을 느끼면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낮선 사람들이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이제는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어젯밤 하우스 안에 들어와 잠을 잔 것까지는 생각이 났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하늘이 보이는 하우스 밖이었다. Van은 자신의 몸이 커다란 구급차량 뒤에서 들것 위에 올려져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벌떡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돌았다.


“잠깐, 괜찮아요?”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이 물었다.


“네..., 괜찮아요. 물 없어요?”

“여기... 좀 어때요? 정신이 들어요?”


물을 마시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내려오자 제복차림의 사람은 안심이 되었는지 옆에 있는 한 남자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마도 좀 더 바람을 쏘이면 괜찮을 것 같다고 말 하는 것 같았다. Van은 지금 몸이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복차림의 사람이 행여 자신을 잡아갈 것만 같아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하우스 안에는 온풍기 시설이 있어 실내를 데웠고 그래서 어젯밤 하우스 안이 후끈거렸던 것이었다. 따라서 Van은 온풍기로 인하여 발생된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난 농장주가 발견함으로서 운 좋게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요?”

“병원? 네, 안가도 돼요. 죄송합니다.”


제복차림의 사내들은 언제 Van의 여권과 신분증을 가져갔는지 짐과 함께 다시 돌려주고는 차를 몰고 돌아갔다. Van 옆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농장의 주인 부부였다.


“어떻게 된 거요?”

“추워서 들어왔어요. 죄송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

“베트남 사람. 사장님, 여기 사람 안 써요? 열심히 할게요.”

“그래? 일하러 왔군. 우선 아침부터 먹자.”


하얀 비닐의 하우스 앞에 회색 천으로 뒤덮인 또 다른 하우스로 들어가니 그곳이 바로 주인의 살림집이었다. 외형이나 내부 모습이나 마치 토굴이나 다름없는 듯 했다. 안으로 들어가 실내의 불을 켜니 TV, 냉장고와 소파 등 가구가 보이는데 농장주 사장님의 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가 낡은 구형들뿐이었다. 한국의 농장은 땅값만 해도 수십억 원이나 되며 1년에 몇 억 원씩 번다고 들었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사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놀라웠다.

잠시 후 차려진 식사를 보니 이것 또한 놀라웠다. 반찬의 가짓수만 많을 뿐 공장의 구내식당에서나 별반 다름없었다. 고기라야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 몇 조각뿐이었고 대부분이 김치며 생오이와 고추에 배추 이파리 등 야채뿐이었다. 공장에서 회식할 때보면 매번 삼겹살이나 등심 등 고기를 시켜 구워먹었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다. 사모님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많이 먹어요, 총각. 반찬이 없지? 뭐 부족한 것 없어?”


Van이 평소에 한국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 제법 많이 먹었다. 마지막에 커피까지 마시니 이제는 정말 살 것 같았다. Van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그래 비자는 있구?”

“네, 여기..., 잠 잘데 있어요?”

“하우스 옆에 방 하나 있지. 공장 다니다 왔나?”

“네, 힘들어서 나왔어요.”


공장 이야기가 나오자 또다시 겁이 났다. 눈치 안채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뭔가 나름대로 대충 짐작을 하는 것 같았다.


“농사일도 힘들어, 공장보다 월급은 좀 적은데...”

“얼마 줘요?”

“응, 여자는 80, 남자는 90만원주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12시간, 한 달 두 번 놀아. 쌀은 한 달 20kg주는데 반찬은 없어. 자기가 사다 해 먹어야 돼. 물론 경력이 쌓이면 월급은 더 올라갈 거야.”


너무 적은 월급에 아쉬웠지만, Van은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따질 것도 없이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감사했다.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마치 자기의 가족 대하듯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아플 테니 오늘은 잠 좀 푹 자고 하루 쉬어. 반찬도 사다 놓아야 할 테고... 내일부터 시작 해. 불편한 거 있으면 맘 놓고 얘기하고, TV는 좀 안 좋은 데 이따가 고쳐줄게.”


‘맘 놓고 얘기하라?’ Van은 스스로 반문하며 생각했다. 이것이 도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정다운 소리란 말인가? 한국에 입국한 이후 1년여 동안 과연 누구에게 마음 놓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단 말인가? 또 몸이 아플 테니 오늘은 잠 좀 푹 자고 하루 쉬라니, 이제 지옥은 끝난 것인가? Van은 마치 꿈을 꾸는 듯 하였다.


‘그래, 나도 운명이 바뀔 때가 있군.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반드시 부자가 되고 말꺼야.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기거할 방으로 짐을 옮긴 다음 부모님께 전화를 거는 대신 모처럼 편지를 썼다. 직장을 옮기는 등 사정이 생겨 당분간 돈을 송금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대부분 희망적인 이야기만 언급하다가 글을 맺었다.



17. 애벌레의 꿈


“자네가 여기 온지 몇 달째지?”


농장주가 Van에게 물었다.


“네, 벌써 6개월입니다.”

“그렇군. 농촌 일 생각보다 힘 많이 들지?”

“아닙니다. 베트남에서도 농사일 해 봤는데요, 뭐. 오히려 거기보단 편해요. 베트남은 기계가 없어서 힘 많이 들어요.”

“그렇긴 해. 하지만 요즘 자네 얼굴 표정이 밝지가 않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고민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집에 빚 갚으라고 돈을 열심히 부쳐드렸는데도 빚은 반도 안 갚고 다 써버렸대요. 이러다 언제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런지 걱정돼요. 언제 부자가 될 수 있나 생각해 본거지요.”

“그래? 그거 나쁜 생각은 아니군. 월급쟁이는 돈 몇 푼 더 받으나 적게 받으나 항상 마찬가지야. 무슨 얘긴지 알아?”

“알아요. 사장님께서 종종 말씀하셨잖아요. 부자 되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구요.”

“그래, 언젠가는 자네도 한 번 꿈을 꾸게 되겠지. 내가 자네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이유요?”

“지금 말이지만, 전에도 베트남 사람, 캄보디아 사람, 필리핀 사람 다 써 봤거든. 근데 이상하게 정이 안가. 믿음이 없었단 말이지. 뭔 소리냐 하면, 여긴 가족 같이 일하는 곳이거든,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농촌은 특히 더 그래. 근데 동남아 사람들은 항상 눈치를 보는 거야. 자네처럼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없었어. 아무리 가족처럼 대해줘도 소용없었지. 내가 지켜서 보지 않으면 능률이 안 올라. 신뢰할 수 없다는 거지. 근데 자넨...”

“네? 나요?”

“그래. 자넨 처음으로 내 자식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눈치 안보고 성실하게 하니까 마음이 놓였지. 그래서 남보다 10만 원을 더 주는 거야. 첨 왔을 때보다는 30만원 오른 건데, 여기 120만 원 받는 사람 없거든.”

“알고 있어요. 나도 부모님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장님 사모님 두 분 다 너무 좋아요.”

“고맙군. 하지만 10만 원을 더 받는다고 해도 자네 사정이 변하는 것은 거의 없을 거야, 아마”

“맞아요. 돈 쓸 일만 더 늘어나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도 사장님처럼 뭔가 해 보고 싶었어요.”


농장주 피을동은 가지를 다듬던 골든크리스트윌마 화분 하나를 1.2m높이의 작업대 위에 내려놓으면서 피식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하지만 사업이란 것은 눈물의 연속이라네.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지. 난 언제 망할지, 언제 추운 겨울 길거리에 나앉을 지 알 수 없었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인 전세방을 털어 목숨을 건 모험을 한 거니까. 처음 일산의 어느 쓸모도 없는 땅을 빌려 농원을 차렸는데, 5년 후 겨우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흑자가 나기 시작하니까 어느 날 계약기간이 끝났다며 나가라더군. 청천벽력에 피눈물이 났지.”

“...”

“난 그날 아내와 함께 밤이 새도록 울었지. 울면서도 땅주인을 원망하는 대신 간간이 하우스로 들어와 꿋꿋하게 자라나는 이 작물들을 만지며 다짐했지. 꼭 언젠가는 내 땅을 가지고 설움 없는 농원을 일구겠다고.

우리 사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수많은 설움을 주지. 하지만 그 설움을 딛고 일어선다면 미래에는 풍요한 꽃과 열매가 있어. 부자의 멋진 꽃을 피울 수 있다구. 기어 다니기만 하는 애벌레로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럽거든. 어떻게든 죽을 각오로 허물을 벗어야만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날 수 있는 거라구.”


농장주 피을동은 말을 계속하였다.


“우린 다시 새 땅을 찾아 옮겼지, 뼈마디가 부서지는 아픔을 견디며 아내와 함께 직접 하우스를 짓고 작물들을 옮겼어. 내 손을 보게나.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어. 그런데도 빌어먹을 운명이 그만...”

“운명요?”

“그래, 너무하더군. 다시 재기를 꿈꾸던 해 겨울, 히터가 고장 나 작물들이 몽땅 얼어 죽은 거야. 어떻게든 하나라도 살려보려고 몸부림치며 히터를 돌려봤지만 한 번 죽은 놈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네. 무정하게도 살아나지 않더라구.”

“그랬군요.”

“그거 치우고 다시 정리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네. 다 치우고 나니까 아내가 뭐라고 한 줄 아나? 눈물을 흘리면서 ‘시집 올 때 아무 것도 못해 와서 미안해요.’ 그러는 거야. 물론 자본 없는 나에게 미안해서 한 말이지만 난 그때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지. 그래, 난 원래 아무 것도 없었던 거야. 모험은 원래 그런 거야.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작물을 바꿨네. 추위에 강한 놈으로 말이야.

그로부터 9년이 더 흐르고 난 다음 이곳 허허벌판 땅을 사서 내 땅을 가지고 지금 꿈을 이룬 거지. 총 15년이 걸리고 다시 10년이 여기서 흘러간 거야. 썩은 거름의 바탕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실패를 딛는 모험이 없으면 결코 성공은 이룰 수 없어.”

“사장님은 직장생활 안 해봤어요?”

“왜 안 해봤겠어. 나도 남의 농장에서 2년을 일했지.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부터 사업을 꿈꾼 거야. 아내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나도 그런 모험을 하면 될까요? 난 더 젊은데.”

“젊으면 더욱 유리하겠지. 하지만 꼭 명심할 것이 있네. 한국에 온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찾는데, 그러면 성공할 수 없어. 자넨 남에게 꼭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남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만 해. 그런 정신만이 자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줄 거야. 나도 이 식물들을 사다가 키우는 사람들을 항 상 생각했지. 이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거 고민하다가 잠을 설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남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거든...”


어느새 날은 저물기 시작하였다. 사장님은 조합에 간다며 먼저 일어서 나갔다. Van도 하던 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다음 하우스 안의 전등불을 켜기 위해 벽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밖에서는 기분 나쁜 회오리바람이 한차례 몰아치는가싶더니 누군가 하우스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듯 인기척이 있었다. 사장님이 다시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무심코 시계를 들여다보니 저녁 6시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이제 조금만 더 있다가 끝내야겠군.”


Van은 베트남 집안에서 기어다니던 도마뱀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모기나 파리 등 해충을 잡아먹기 때문에 이로운 동물로 인정받아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필요하면 도마뱀도 사람 사는 집안에서 내쫒지 않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사장님 말씀이 맞아. 필요한 존재가 되면 불법체류자도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업도 할 수 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힘이 솟는 듯 하였다. Van은 작업대 밑 연장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는 곳에다 조경용 가위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며 고개를 드는 순간,


“흐익!”


바로 눈앞에는 멧돼지처럼 건장하게 생긴 낯선 사람 하나가 불과 5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잠시나마 지금까지 Van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Van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주춤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이때 남자는 갑자기 모자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화가 난 사람처럼 크고 짙은 선글라스도 함께 벗어 내던졌다. 얼굴 구석구석마다 기분 나쁘게 살기를 띤 저 얼굴,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린 그는 매우 낮 익은 얼굴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바로 배상일이었다. 가슴이 철렁한 Van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분명 꿈이 아닌 생시였다.

“여길 어떻게...?”

그러나 그런 질문은 지금 어울리지 않았다. 분명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기를 찾아 왔을 것이고,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 복수! 복수였다.


“오랫만이군, Van!”


그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첫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Van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주춤하며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설 뿐 몸의 어느 부분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자신은 독안에 든 쥐였다.

그는 코트 안쪽 옆구리에서 지니고 있던 물건 하나를 꺼내들었다. 바로 손도끼였다. 주머니에서도 작은 칼 하나를 꺼낸 다음 과시하듯 Van에게 보여주고는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자, 빚을 갚아야지? Van!”


이번에도 Van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분위기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살벌하였다.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Van! 그 당당하던 용기, 숟가락으로 내 눈과 귀를 무참하게 내려찍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말이 없는 거냐구! 응? 사람도 한 번 피 맛을 보면 잊지 못한다더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작업대의 화분을 보란 듯이 손도끼로 힘껏 내리찍어버렸다.


“파박!”


적막을 깨드리는 소리와 함께 화분 하나가 여지없이 둘로 쪼개지며 날카로운 도끼는 작업대 바닥에 찍혀버렸다. Van은 마치 자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놀라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자, 시작하지. 솔직히 말하지만, 난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다만 네 눈 한쪽을 내 놔야 해. 공평하잖아? 안 그래?”

“...”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먼저 할 일이 있지. 네 다리를 먼저 부러트려야만 해. 넌 발악을 할 거니깐... 난 눈이 한쪽 밖에 없기 때문에 정확치 못해. 네가 달아나거나 몸부림칠수록 한 번이라도 더 너를 찍어야만하거든... 그러면 네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거야. 자, 좋은 말로 할 때 여기 작업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지. 그럼 넌 살 수 있잖아, 이건 너한테 베푸는 나의 마지막 자비야. 알간?”


참으로 기가 막혔다. 한마디 한마디마다 정말로 배상일다웠다. 하지만 Van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순순히 다리를 그에게 내 줄 수는 없었다. 저 무지막지한 도끼로 다리가 아니라 어느 곳이든 찍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금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였다. 오른쪽과 뒤에는 두꺼운 보온용 비닐 담벼락, 결코 한 번에 뚫고 달아날 수 없는 질긴 벽으로 가로막혀 있으며, 왼쪽에는 철제 골격 위에 두꺼운 나무판자를 올린 1.2m높이의 작업대가 피할 곳도 없이 가로막혀 있었다. 상일은 무시무시한 도끼에 칼까지 살인적인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Van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없는 맨손뿐이었다. 상일의 바로 앞 작업대 아래에는 갖가지 연장이 놓아져 있었지만, 그것을 잡으러 가려다가는 먼저 도끼세례를 받아 쪼개지고 으스러져 죽고 말 것이다. 이런 Van의 생각을 다 아는 듯 상일은 또다시 말문을 열며 빈정거리기 시작하였다.


“넌 눈치가 무척 빠른 놈이지. 한국군을 몰아내고 미군을 이긴 날렵한 베트콩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젠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지. 여기 너를 도울 사모님과 사장님이 조금 전 차를 타고 외출하는 걸 보고 들어왔거든. 자, 빨리 말을 들어. 다리를 올려놓으라구, 새끼야!”


왼손으로는 Van을 가리키며 오른손으로는 도끼를 들어 어깨 위로 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다시 깜짝 놀란 Van은 뒷벽에 바싹 붙어버렸고 덜컹한 가슴은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더 이상 상일의 행동이 이어지지 않자, 잠시 숨을 돌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 떻게... 알... 고... 와, 왔어요?”


상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허 참,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그래, 마지막 소원이라면 말해주어야지. 암, 지금 아니면 들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깐...”


상일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것은 Van의 모습이 크게 확대된 사진이었다. Van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직원들과 기념으로 함께 찍었던 사진.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는 거야. 뭔가는 흔적을 남긴다구, 알아? 난 이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숱한 나날 공장이고 농장이고 널 찾아 헤매고 다녔지.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너를 찾아내었다. 호시탐탐 네 눈에 칼을 꽂을 날을 저 행길 나무 뒤에 숨어서 기다린 거라구.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단 말이다. 됐냐?”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지난날을 생각하며 천정을 향해 중얼거리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



18. 칼 가는 세월


상일의 왼쪽 눈 상처는 수술을 마친 후 4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생활에 불편이 없을 만큼 아물어가는 것 같았다. 상처가 아물수록 Van에 대한 복수심은 점점 뜨거워만 갔다. 함께 소주잔을 나누던 동료 기술자 김성주가 물었다.


“오늘도 공장마다 돌아다녔나?”

“돌아다녔지.”

“오늘은 어디를 찾았나?”

“일주일 전부터 용인 쪽을 다 뒤졌지. 내일부턴 화성시 쪽을 뒤져야겠어.”

“그래? 하긴 자네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알긴 뭘 알아?”

“이제 그만 잊어버리는 게 어떤가, 하는 거야.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거보다 더 어렵다구. 그러구, 찾으면 뭘 할 건가? 복수를 한다구 자네 인생이 옛날로 다시 돌아가나? 차라리 이제라도 다시 새 출발하는 게 어떠냐는 거지.”

“무슨 소리! 어림없어. 난 다 잃은 사람인데 뭘 시작하냔 말야, 응? 빚은 갚아야 시작하고 말고 할 거 아냐.”

“미친개한테 무슨 빚을 갚아? 그냥 물렸다고 생각해버려, 그만....”

“자넨 몰라, 내 심정 말이야. 아무것도 모른다구.”


상일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펼쳤다. 그의 도망간 베트남 아내 Vo Thi Le와 함께 찍은 결혼사진이었다. 너무나 예쁘고 다정스런 얼굴과 모습. 그야말로 잉꼬 같은 한 쌍의 부부모습이었다. 상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성, Vo Thi Le! 그는 그녀를 증오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계집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었지.”

“그래, 예뻣지. 하지만 그런 여자 다시 찾으면 돼. 세상에 여자는 많거든.”

“난 그 말이 가증스러워. 지금 난 애꾸야. 애꾸눈을 좋아할 여자 있어? 말해봐, 어떤 미친년이 남자가 없어서 나 같이 못난 애꾸눈을 좋아할 거래? 난 재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돈은 벌지 몰라도 평생 혼자 살아야 해. 너무 잔인하지 않아?”

그러면서도 그는 떨어지는 눈물에 사진이 젖지나 않을까 꽤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고 나서는 나 장가드는 걸 보고 돌아가시겠다고 하셨거든. 그래서 부랴부랴 베트남으로 가 장가들고 온 거란 말이야. 알아? 글구 결혼사진을 보여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빨리 며느리가 보고싶다고 하셨는데 그만, 며칠 안 되어 눈을 감으셨거든. 색시는 그것도 모르고 한국에 온 후 보름 만에 집을 나갔으니 이런 쥑일 년이 있어? 그년을 그냥....”


하지만 상일은 사진을 다시 한 번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지갑을 접어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자네 장가 한 번 더 가지. 이번엔 캄보디아 쪽 어때? 눈 한쪽 잃었다고 뭘 못하겠나. 달라진 것 아무 것도 없어.”

“위로하지 마. 괜찮아. 하지만 두 베트남 놈은 똑같아. 다 죽이고 말거야.”

“참, 이번엔 한국에 와 있는 외국여성을 고르면 어떨까? 응? ‘남사’에 가면 동남아 여성들이 꽤 있다더군. 그전에 Van도 거기 와 있는 베트남 아가씨한테 전화를 걸어 사람 쓰는 곳이 있냐구 물은 적이 있거든?”

“무... 뭐라구?”


갑자기 상일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했어, 지금. Van이 남사에 있는 아가씨한테 일 할 곳을 물었다구?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왜! 젠장!”


무심코 뱉어버린 말에 성주 자신도 놀랐다. 그리고는 곧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 맞아! 내일부턴 그곳을 찾아야 해. 샅샅이 뒤져서 꼭 찾고 말거다.”


상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오산을 지나 남사로 달려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비닐하우스마다 뒤지기 시작하였다.


“실례지만 혹시 이 사람 못 봤나요?”


태국인 부부는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뚱뚱한 여자가 말을 하였다.


“봤어요. 오래 전 여기 들렸어.”

“네? 언제쯤이죠?”

“음... 하여튼 오래.....”

“어디로 갔어요?”

“그거 몰라.. 하하.”


상일은 처음으로 희망을 느꼈다.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머니와 옆구리에 찬 칼과 손도끼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짙은 안경에 커다란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는 코트와 목도리로 온 몸의 살을 감싼 채 비닐하우스마다 차례차례 뒤지며 나아갔다. 갈수록 기온은 떨어져 갔지만 바람이 불고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도 복수를 향한 수색은 멈추지 않았다.



19. 반전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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