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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능력에 따른 삶과 인정욕구

알랭 드 보통, <불안>

by 스마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나는 좀 다르게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기도 했다. 좌절하기도 했고, 내 외모에 늘 만족하지 못했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너무 피곤한 시절이 있었다. 그 누군가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너무 신경 쓰여서 말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드니 그렇게 남들을 의식하는 것도 순기능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함-이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생각보다 남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으니 좀 더 주체적인 내가 되자는 다짐도 해본다. 이제는 사람들의 평가에 덜 예민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하다. 잘 보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 시선에 완전히 무뎌지는 것이란 결국 불가능한 것 같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잣대로 내 삶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내가 부족하고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었음을 이 책이 알려주었다. 이 책은 사랑과 관심, 인정 욕구에 대한 근원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기회는 많아지고, 궁핍함은 늘어나고

특히 다른 사람에게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능력'에 따라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자본주의/자유주의가 있다. 신분계급제 사회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평민은 귀족이 누리는 화려한 옷, 쾌적한 집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기술이 발달하며 소수 계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대중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이 가진 사람이 곧 능력 있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좋은 사람'으로까지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한한 기회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전에 없던 궁핍함을 느끼게 했다. 모든 사람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되려 심한 궁핍을 준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도 모든 이들에게 '능력만 있다면' 무한한 기회가 열려있다고 말하기에, 무언가를 손에 쥐지 못하면 '능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만약 내가 계급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일생 동안 나에게 주어질 기회와 그것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불안은 더 낮았을까? 더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주었기에 오히려 더 갖지 못해 부족해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 눈에 난 이만큼이나 가진 사람이야,라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다만, 능력 기반의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는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 기회가 정말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눈에 보이기 않는 계층이 존재하고, 엄청난 교육열의 이유가 계층 이동 사다리를 타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정말 기회 역시도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내 능력'과는 무관하게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는 경우는 정말 없나?


-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능력주의 사회의 이상 덕분에 다수가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수백 년 동안 부동의 계급 제도 내에 억눌려 있던 재능 있고 똑똑한 개인들이 이제 전체적으로 평평해진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 "새로운 영국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처음으로 과거의 주인님과 마님만큼 잘살게 되었다."

-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원시의 야만인보다 더 심한 궁핍을 느낄 수도 있다.

<불안> 중에서



남들의 평가가 중요한 이유

또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늘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는 저자의 주장이 명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는 신경 안 쓸 테지만, 슬프게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외부의 평가를 통해 그 의견을 확인하려고 한다.


-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렇게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를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불안> 중에서




1.

무한한 기회가 오히려 궁핍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의 궁핍과 열등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열등감은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 나의 내면 어딘가에는 열려있는 기회를 붙잡고자 하는 열정이 남아있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고, 좀 더 노력해서 나에게 꼭 맞는 일을 해보며 살아가고 싶다는 열정을 그 누가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2.

이제는 내가 왜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신경 썼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 나도 정확하게 모르게 때문이고, 나에 대한 평가도 스스로 매번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외부의 시선을 빌려 정말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정하고 싶어서 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을 제일 잘 알고 있을 나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한다. 나를 좀 더 사랑해 주고, 나의 약점을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 스스로를 위해 정한 원칙을 작은 것부터라도 지켜나간다면 외부의 평가를 빌리지 않고도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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