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1992)
강민주(주인공)의 허세가 처음엔 조금 불편했다.
조지 윈스턴의 연주를 들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리는 그녀는 무려 32년 전에 만들어진 소설 속 인물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여자다.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담사이지만 그 직업은 본인의 학위 논문을 위한 이야기 수집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 동정 따위 느끼지 못하는 여자다.
그리고 강민주 어머니의 은혜로 가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한 남자가 있다. 강민주를 여왕처럼 섬기는 그 남자의 이름이 재밌다. 황남기. 남기라는 이름에 혹시 숨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름처럼 '남기'는 굉장히 남자다운 우락부락한 사람인데, 밤거리에서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지만 강민주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한다.
강민주에게 납치당하는 최고의 톱스타 백승하.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고, 연기를 사랑하는 당대 최고의 로맨티시스트. 강민주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을 거라 했지만 실제로 백승하는 누군가에게 거짓말하거나 다른 사람인 척 살지 못했던 순수한 사람이었다. 한 가지 숨겼던 것이 있다면 본인의 불우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당시 한국에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켰을 만큼 화제였고, 여성억압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는 평이 많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장면을 보고 자라야 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상담소에서 매일 같이 '죽지 못해 산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여성은 '남성'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심과 복수심을 지니고 있으며, 본인 인생에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본인의 행동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이루고자 하는 바에 대해 치밀하게 계획한다. 주변에 있는 남성은 전부 모자란 족속들이다. 심지어 본인 이외의 여성까지도 경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처럼 비겁한 것이 없다고, 왜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 견디고 희생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차갑게 말한다.
처음엔 남성-여성 이분법적 구도와 모든 남성을 경멸하는 여주인공의 독백이 여성인 나에게도 불편할 정도였다. 남성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과 비아냥을 모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단순히 이런 적개심만은 아닐 텐데.. 하며 읽어 내려갔다. (뒤로 갈수록 점점 납득할 만한 모습으로 여주인공의 감정선이 변화하긴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 가정폭력이나 여성 차별 문제가 다소 개선되었을지 모르나 여전히 저 어딘가에서는 현실일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남성 대 여성의 구도로 만들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고용인-피고용인, 정규직-비정규직, 부자-흙수저, 화이트칼라-블루칼라, 학벌, 사는 동네, 끌고 다니는 자동차... 차별은 더욱 다양해지고 만연해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강민주가 비겁하다고 했던 이 말은, 아마도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이유가 된다. 대부분은 그 사람이 자식이나 부모 등 가족인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죽고 나면 엄마 없이 남겨질 나의 아이만 생각하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자식 앞세우고 나서 살아가야 하는 내 부모님은 또 어떤가. 세상살이 힘들다고 나 혼자 비겁하게 도망가는 것 같아서 못 죽었다. 그래서 나는 죽지 못해 산다는 말 이해한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를 납치한 후 언론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것이 진정 30년 전에 쓰인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사람들이 언론을 비판하는 태도와 너무 닮아서 인상 깊었다. 어떤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 것처럼 몰려들었다가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확 꺼져버리는 냄비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한다던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이야기까지 만들어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모습으로 언론을 묘사하는 주인공의 독백이 있는데, 이 내용은 30년이 지난 지금 언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와 꼭 들어맞는다. 언론에 대한 이런 비관적인 태도는 왜 변하지 않았던 것일까?
잠깐이지만 언론사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다. 그때 내가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선배들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비난하는 '기레기'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팩트 체크가 생명이고, 자극적인 기사는 지양하며, 취재원 보호에 민감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 반드시 자문을 구하는 등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이 현장에는 더 많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한때 나의 꿈이었던 업계가 무턱대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좀 불편하다. 적어도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들이 모두 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강민주는 남성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급기야 남자 배우를 납치까지 하고 마는데, 납치 이후 자신의 옆에 있는 두 남자(황남기, 백승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백승하와 연극을 하는 과정에서 교감을 나누고, 점점 감정이 변해가는 스스로를 느낀다. 나중에는 백승하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이유로 백승하의 아들까지 납치하는 행동을 보일 정도인데, 본인 이외의 모든 사람을 혐오하며 특히 남자라면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갖던 주인공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이 분명한 장면이다.
주인공의 감정선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렵긴 했다. 전반부에서 너무나 차갑고 인간적인 면모가 전혀 없던 강민주가 그깟 연극을 몇 번 한다고 마음이 바뀌나 싶어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결국 강민주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불안함으로 상처를 받고 자란 사람이고, 강민주 외 백승하, 황남기 모두 마음속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고 상처를 준다고 해서 내가 가진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는 순간 내 상처도 조금은 덜 아파지는 건데, 이 소설에서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각자 동등한 자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데 유용하게 쓰여야 할 사진이다. 강민주의 테러가 잔인한 보복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더운 인간의 길로 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양귀자 작가의 다른 작품인 <모순>의 초판일자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니 이 소설이 98년도에 쓰였다고? 지금의 사회상하고 이렇게 똑같은데?'.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읽고 난 뒤에도 나의 반응은 똑같았다. 진정 30년이 넘은 소설이 맞다는 말인가. 놀랍고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당대의 흐름을 반영한 소설일지라도 우리 삶에는 변하지 않는 두꺼운 무언가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무언가가 밝음보단 어두운 측면이라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말이다. 아직 읽지 못한 양귀자의 다른 소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