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면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상처를 드러내고, 부끄러움을 털어놓고, 나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리고 이런 사람이지만, 나 또한 글을 쓰고 있노라고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 출판되는 글을 쓰는 작가라면 독자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겪은 시간들이나 겪고 있고, 겪을 일들도 모두 내 글에 녹아 있다. 그 수많은 경험들이 내 글에서 문장 하나로 변해서 톡톡 튀어나올 때가 있다.
저녁을 먹은 뒤 반려와 산책을 하러 나왔는데, 투명 테이프를 사다달라는 아이 말에 문구점에 들렀다. 테이프를 앞에 놓고 내가 물었다.
“당신은 이걸 뭐라고 불렀어?”
“스카치 테이프.”
“그건 상표명이잖아.”
“난 고등학교 때까지 이런 테이프를 본 적 없었어. 그러니까 처음 본 상태로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런데 왜?”
“난 다르게 불렀거든.”
“뭐라고 불렀는데?”
“…….”
“응? 뭐라고 했는데?”
“유리 테이프.”
“뭐? 그게 뭐야!”
반려는 정말 깜짝 놀라더니 웃었다. 하지만 나는 심각했다. 처음 그 테이프를 본 문구점에서 아저씨가 그 테이프 이름을 ‘유리 테이프’라고 불렀다. 내 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고, 형제들도 그랬다. 그 테이프를 ‘투명 테이프’ 혹은 ‘스카치 테이프’로 부른다는 건 20대에 내가 살던 곳을 떠나 서울로 왔을 때였다.
“유리 테이프 있어요?”
이렇게 물었을 때, 팬시점 아르바이트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이 내게 정확하게 뭘 찾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유리 테이프가 어떻게 생긴 건지 한참 설명했다. 투명하고, 종이와 종이를 붙인다는 말에 아르바이트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 스카치 테이프!”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걸 여러 번 겪었다.
하숙집에서 만난 수많은 학생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이 특히 그랬다. 같이 맥주 한 잔 하기로 한 저녁에 누가 과자 안주를 사러 갈 건지 정하기 위해 “감자에 싹이 나서…….”를 했는데, 그 다음 상황이 이랬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여기까지는 똑같았다. 그런데
“감자감자 뽕!”
“가위 바위 보!”
“싹싹싹!”
등 지역별로 다른 말을 하는 바람에 웃음보가 터졌다. 왜 그렇게 부르느냐는 말에 우린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렀다, 너희들이 이상하다, 우리가 뭐 어떠냐,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었다.
돌이켜보면, 팬시점에서 그 일을 겪은 뒤 나는 테이프를 소리내어 불러보지 못했다. 물어보지 않고 찾아내어 계산했다. 내겐 어릴 때처럼 여전히 유리 테이프가 편하다. 아마도 투명해서 누군가 붙인 이름일 텐데, 어째서 그렇게 불렸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런 과거들도 다 내 속에 녹아 있다. 우물쭈물하고, 낯선 것에 신기해 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알고자 했던 호기심이 나를 이루었다. 하지만 경계는 늦추지 않는다. 혹시 나만 알고 있는 표현이나 단어를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리라 착각하진 않는지, 내 글에 그런 오류가 나타나진 않는지 살핀다. 여전히 유리 테이프를 사랑하는 자아가 남아 있으니, 그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