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비 대신 여행비로

by 김하은

큰 애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조기 교육 광풍이 불었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한글 교육을 시키는 교재가 비싼 가격으로 팔렸고, 곧이어 영어 교재도 마찬가지였다.

“애들이 어릴 때부터 공부를 시켜야 고생 안 한대.”

그 말을 이십 년 가까이 들었다. 심지어 학교에 학부모 면담을 가서도 들었다.

“어머님이 순진하신 거예요. 요즘은 선행학습을 다 해요.”

그때 나는 너무 놀라서 멍하니 있다 돌아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글과 구구단을 떼고, 중학교 1학년쯤 되면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이미 고3 과정을 예습해야 정상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나와 반려는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처음 조기 교육 광풍이 불었을 때부터 교재비와 학원비 등을 계산해 보았다. 그랬더니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을 교육비로 돌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온전히 아이 교육에 매달리다 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반려와 나는 깊은 고민을 한 결과, 조금 다르게 살기로 했다.

“학원비 대신 여행비로 쓰자!”

그렇게 정하고, 정말 배낭을 메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날 때는 큰애가 유모차를 타고 다닐 때였다. 내 퇴직금을 긁어모아 무작정 떠났다. 그러고는 일본으로 갔고, 다시 유럽으로 다녀왔다. 두 번째 유럽 배낭여행을 갈 때는 안데르센 대상을 받은 상금을 탈탈 털었고, 다른 돈을 보태야 했다. 가장 최근에 떠난 가족여행은 5년 전, 빌바오와 바르셀로나로 보름 동안 다녀왔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돈을 모으면 여행을 떠나는 일상을 반복했다. 학원을 안 보내는 대신,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했다.


프리랜서라 돈은 부정기적으로 생기고, 꼭 써야 할 돈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돈이 생기면 어떤 돈은 여행용으로 떼어놓고, 학비로 떼고, 적금으로 떼고, 이렇게 저렇게 떼다 보면 내가 마음놓고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이 모이면 어디로 떠날지 궁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처음 배낭여행을 갈 때는 세 명이었던 가족이 네 명으로 늘어났고,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하던 우리들은 뻔뻔해져서 말이 안 통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접고 일단 부딪히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쓰이는 짧은 인사말들을 익혀서 숙소에 드나들 때마다 써먹었다.


환율이 어마어마하게 올랐을 때 떠난 두 번째 유럽 배낭여행 때는 주로 유스호스텔에서 묵었다. 끼니는 장을 봐서 공동식당에서 해 먹었는데, 돈을 아끼기 위해 ‘Free’로 두고 간 재료들 덕을 많이 봤다. 배낭여행자들은 여행을 거의 끝마칠 무렵이 되면 자기 배낭에 든 음식들을 다음 여행자들을 위해 남겨놓는다. 유스호스텔에는 ‘Free’를 붙일 수 있는 스티커가 따로 마련된 곳도 있고, 아예 ‘Free’를 둘 수 있는 선반이 있는 곳도 있다. 스파게티 면, 소스, 가끔 즉석밥도 남아 있다. (한국식 즉석밥이 아니고, 안남미를 데울 수 있는 즉석밥이다.)

도쿄에서는 기념품을 더 사야 하는데 시간에 쫓겨서, 일단 식당에 아이들만 놓고 도시락 두 개를 시켰다. (같은 층이었다.) 그러고는 기념품을 사고 식당으로 돌아왔더니 애들이 해맑게 웃으면서 포크를 두 개 더 시켰노라고 자랑했다.

“어떻게 시켰어?”

말이 안 통하는 데다 어른이 없으니, 종업원도 당황했을 텐데 아이들은 포크를 번쩍 들어서 손가락 두 개를 폈다고 했다.


국외 여행뿐만 아니라 국내 여행도 많이 다녔다. 축제마다 쫓아다녔고, 절이나 성당 등 교과서에 나올 만한 곳으로는 발로 직접 밟으며 다녔다.


애들이 학원에 다닌 건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였다. 그나마 큰애는 수학 한 과목만 다녔고,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어 학원을 다니려고 했더니 진도가 맞는 클래스가 없다며 혼자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둘째는 수학과 국어를 배웠다.


지금 다시 그런 기회가 생긴다 해도, 나는 다시 여행을 다닐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피요르드 아래에서 반지의 제왕을 이야기하고, 안데르센 생가에서 인어공주를 꿈꾸었고,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토토로를 만났다. 덴마크 농부와 4H에 대해 이야기했고, 스페인 가게에서는 홍시를 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는 한 사람의 집요함이 도시와 여러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이야기했다.

그 덕에 나 또한 글을 쓸 힘을 얻었다.


그때 우리가 먹었던 가장 가난한 밥상은 지금도 생각난다. ‘Free’ 딱지가 붙은 스파게티 면을 라면 국물에 삶아서 말아먹었다. 가게에서 산 오이 두 개를 잘라서 튜브 고추장에 찍어먹는 걸로 반찬을 대신했는데, 우리가 먹는 걸 여러 사람들이 구경했다. 특히 꼬맹이들이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며 신기해했다.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아이들은 우리 대신 입장권을 샀고, 가이드 역할을 충실해 했으며, 짐을 번쩍번쩍 들었다. 그런 여행을 다시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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