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마감을 3일이나 앞두고 응모를 해버렸다. 자꾸 파고들고 들러붙는 반려견 억지로 입양 보내듯, 내 일상을 좀먹던 징글징글한 벌레를 드디어 떼어내 멀리 던져버리듯 그렇게.
4월 1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에 갔다. 나무마다 연둣빛 고운 나뭇잎들이 부는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의 산행이라 오르막을 조금 올랐을 뿐인데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뻐근하게 무거워지고 땀이 흘러내렸다. 자주 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뿜어냈다.
30분쯤 올랐을까. 선 채로 숨을 몰아쉬며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폰을 꺼내 보았다. 화면 상단 알림 창에 'ㅇㅇㅇ님이 내 브런치를 구독합니다'라는 문장이 떴다. 반가웠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은 지 2주일이 되어가고 구독자는 86명에서 요지부동인 상태라 더욱 반가웠다. 반갑고 궁금하여 브런치스토리앱으로 이동하지 않고 바탕화면에 뜬 그 알림을 내려 바로 터치했다(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이것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그랬더니 브런치스토리앱으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화면이 닫히는듯 바로 열리면서 로그인을 하라고 했다. 갑자기 웬 로그인?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로그인을 했다. 그랬더니 '찌니'라는 닉네임으로 되어 있는 내 브런치스토리 대신에 나의 본명인 'ㅇㅇㅇ님의 브런치입니다'가 떴다. 다시 가입을 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아무리 들락날락해도 내 브런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삶의 중요한 한 시기가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아 잠시 온몸이 그대로 굳는 것 같았다.
겨우 발걸음을 내디뎌 다시 산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거지? 언젠가 갑자기 자신의 브런치스토리가 사라졌다고 브런치스토리의 글을 다른 곳에 옮겨놓으라고 했던 어떤 작가분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면 내 글도 없어진 걸까... 불안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폰을 열어보았다. 모든 기계가 좀 이상할 때는 껐다가 켜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폰을 껐다가 다시 켜 보았다. 여전히 나의 브런치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나의 브런치에는 99개의 글이 저장되어 있다. 그 글이 몽땅 사라진다면? 사라진다면? 아까운가? 읽어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부끄러운 졸작이지만 그래도 내가 거기에 들인 시간과 에너지와 고뇌와 고통이 얼만데... 그게 다 사라진다고? 안돼... 안돼...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폰을 열어 브런치스토리팀 알림에 글을 썼다.
' 지난해 8월에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어 지금까지 99개의 글을 발행했고 구독자가 86명인 제 브런치스토리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저의 브런치를 꼭 찾아 주세요 ㅠㅠㅠㅠ'
자주자주 멈춰 서서 답장을 기다렸으나 답은 오지 않았다. 브런치스토리팀의 알림은 알림 기능만 있을 뿐 답을 주는 기능은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빨리 내려가서 노트북으로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바로 내려가려고 몇 번이나 돌아섰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봄산이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일단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있는 첫 번째 쉼터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올라가면서도 온통 내 사라진 글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렇게 허술한 브런치스토리에 대한 분노와 디지털에 서툰 나에 대한 자책으로 마음이 어수선하고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런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아깝고 안타까운데? 그게 뭔데? 니 글이 뭐... 그 허접한 글이....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내놓지 못하는 그 글이... 뭐? 뭐가 아깝고 안타까워? 무얼 기대하는데? 가끔씩 내가 내 지난 일기 꺼내보듯이 읽어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끔은 엎어버리고 싶기도 했잖아... 발행한 글을 다 삭제하고 싶기도 했잖아...
급기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건 어쩌면 누군가의 계시야... 그만두라는...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도 신의 뜻이 있어서라고 누군가 말했었지...
아니... 그만두라는 계시이기보다... 아직은 때가 아니고... 아직은 혼자 연마할 때이지 내보일 때가 아니라는...
한걸음 떼어 옮길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잘됐어... 홀가분해... 난 에세이는 아니야... 에세이를 쓸만한 특별한 서사가 없잖아. 서사가... 아니... 서사 없는 생이 어디 있어... 자신만의 서사일 뿐이어서 그렇지... 아니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듯이 가장 사사로운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는 거지... 어떻게 표현해 내냐는 거잖아... 나는 그게 부족한 것이고... 부족한 것이고...
마음이, 생각이... 중구난방 미친년처럼 널을 뛰었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어찌어찌 뒤적거리다가 내 브런치를 찾아냈다. 검색란에 '찌니'라는 나의 닉네임을 넣고 '작가'를 터치했더니 나의 브런치가 나왔다. 글도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몇 번을 나갔다 들어와도 '글쓰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다른 닉네임으로 가입을 하고 글쓰기를 해서 발행을 하려 했더니 '작가신청'을 먼저 하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책 세 권(백수린 눈부신 안부, 이승우 사랑의 생애, 미시마유키오 금각사)을 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분간 읽는 데 집중하자고...
암튼 참 포기는 잘해...
그리고 오늘 5월 중순에서야...
4월의 캘린더를 들여다보았다.
산에 가기 딱 좋은 계절이라 일주일에 두 번 꼴로 산에 갔다. 가입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산악회 산행도 실행했다. 내 생각과 기대와 맞지 않아 어쩌면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두 번을 갔다.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갈 것 같으니 이렇게 낯선 세계에 조금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나 보다.
친구 세 명과 여수여행을 다녀왔다. 오는 길에 작은 접촉사고가 있었다. 뒤차의 과실이기 때문에 약간의 보험금도 탔다. 이것 또한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집을 보러 다녔다. 이곳에서 15년 가까이 살았다. 이제 이사 가는 곳에서 남은 생을 다 보낼지도 모르겠다.
변함없이 독서를 했고... 브런치스토리에 들어가서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었다. 가끔 쓰고 싶은 열망이 차오르면 핸드폰에 그야말로 '써 갈기'고는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또 가끔은 브런치스토리에 다시 작가신청을 할까도 싶었다. 그러나 브런치스토리에서의 나의 활동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할 활동계획(발행할 글의 주제, 소재, 목차)에서 망설이다가 막혔다. 첫 작가신청 때는 퇴사 후 시작된 백수생활의 자유와 설렘과 기대감으로 신청하여 합격했는데 지금은 무슨 명목으로 작가신청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고 자신도 없었다. 망설이고 포기하고 다시 망설이고 미루면서 5월을 맞이했다.
5월 들어 두 번이나 남편과 제부도에 갔었다. 첫 번째는 바닷가에 캠핑의자만 내다 놓고 앉아 있었는데 두 번째는 탠트까지 쳤다. 남편이 텐트 안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바닷물이 빠져나간 넓은 갯벌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금요일이라 사람들이 드물었다. 철 지난 겨울바다 같은 분위기였다. 굴과 따개비들이 빈틈없이 붙어 있는 시커먼 돌들이 많았다. 갯벌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을 태운 노란 차가 천천히 달려 사람들을 내려놓는 끝까지 걸어서 들어갔다. 머리 위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서늘했다. 멀리 달아났던 바닷물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처럼 상념에 빠져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바닷물이 이만큼 들어와 찰랑대고 있었다. 갯벌에는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바위가 많았고 그 바위가 조금씩 물에 잠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헤어질 결심'이 생각났다. '서래'가 바닷물이 무섭게 차오르는 바닷가 모래를 파고 들어가 사랑하는 형사 '해준'에게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미결사건이 되고자 했듯이 나도 바위 뒤에 몸을 결박하고 있으면 바닷물에 잠겨 사라지겠지... 사방에서 바닷물이 포위하듯 압박해 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럴 때 바닷물의 찰랑거림은 다정하게 위협하는 비정한 얼굴 같이 보였다. 여기로 들어오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게 해 줄게...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지만 쉽게 잊히지는 않도록 해줄 수 있지....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남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모든 형체가 봄날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고 가물가물하게 흔들려 보이는 거리였다. 나는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에세이도 좋고 소설도 좋고... 소설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가 남편과 제부도에 와서 스스로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바위 뒤편에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워 서서히 다가와 차오르는 바닷물에 잠기는.... 서래처럼 절망적인 사랑...
에이 유치해... 그렇게 또 머릿속에서 들끓는 스토리를 털어내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한 달 보름 만에 노트북을 열고 브런치스토리에 들어왔다.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헷갈려서 애를 먹었다. 내 브런치스토리를 클릭해 보았다. 웬일인가... 그대로 있었다. 핸드폰에는 없던 '글쓰기' 코너까지 그대로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으로 내 브런치스토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노트북으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 노트북을 여는 것은 항상 두려운 일이었으므로 그랬을 것이다. 국세청 홈페이지에 들어가기 위해 몇 번 노트북을 열기는 했지만 브런치스토리는 외면해 왔다. 내가 응모한 응모작도 한 달 보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나는 참 소심하고 한심하고 겁쟁이다.
어쨌든,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건가....
또다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일상을 살게 되었다. 쓰지 않고 사는 삶이 편하기만 했다면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나는 또 이렇게 이 자리에 왔다. 한 달 반쯤 까짓 그게 뭐라고... 그러나 나는 어쩐지 아주 먼 길을 아주 오래 헤매다 돌아온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