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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Sep 12. 2023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마음 짠한 친구를 위하여




ㅡ뭣들 하시나... 나는 남편이랑 휴가로 어제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 갔다가 너무 더워서 다른 계획 취소하고 그냥 집에 왔어... 복잡한 일  있는데도 휴가니까 일단 출발해 봤는데 결국 하룻만에 와버렸네... 흰 휴가일 텐데 뭐 하나?? 진은 이 미치게 더운 날도 산에 갔나?ㅡ

세 친구 단톡에 경의 톡이 올라온 것은 오후 세시 무렵.  나는  수리산  수암봉에 갔다 와서   막 샤워를 한 후 산밑에서 사 온 고추를 찍어 찬물에 식은 밥 말아먹으며 콩나물을 삶고 있었다. 멸치꽈리볶음을 하려고 냉장고에서 시들어가는 꽈리고추도  씻어놨다. 계란장조림도 할 참이다. 며칠 동안 집안일에 게으름을 피웠더니 냉장고에 내놓고 먹을 반찬수가 급격히 줄어 헐렁해졌고 빨랫감도 쌓여있고 집안 구석구석 먼지도 굴러다닌다. 며칠 집안일에 소홀리 한 흔적은 어찌 이리도 선명한지...

  ㅡ나 산에 갔다 왔지... 씻고 밥 먹으면서 콩나물 삶고 있다. 콩나물냉국 만들려고...  늦게 퇴근한 아들이 시원하다고 잘 먹어서..... 다른 밑반찬도 좀 해놓으려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  나는...ㅡ

희가 톡을 보지 않고 있길래 내가

ㅡ희는 휴가라고 어디 갔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 보군...ㅡ

라고 올렸고 이어 경이

ㅡ그러게.... 재밌게 보내고 있나 보네... 재밌게 보내라... 난 좀 퍼져  있으련다 ㅡ

20분 후쯤 희의 톡이 올라왔다.

ㅡ자고 일어났다... 이리 환한 대낮에.... 세상 허무하네..ㅡ

이어서

ㅡ나 느지막이 아침을 먹었는데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 다 토했다ᆢ
그래서 잔 거야
뭔 속인 지ᆢ
이제 밥을 조금 먹어봤어
긴장하면서
아직까진 괜찮아ㅡㅡㅡ

휴가 첫날을 토하고 잠을 잤다니 맘이 짠해졌다. 흰 5년 전 남편을 췌장암으로 보냈다. 희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는 경.

ㅡ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 너네 동네 갈게... 진 너도 나와...ㅡ

주방에 할 일을 잔뜩  벌여놓은 나는 당연히 거절.

ㅡ귀찮아... 할 일도 많고... 희 속도 안 좋다는데... 낼 만나 그냥...ㅡ

그런데 희가 뜻밖에도

ㅡ지금은 괜찮아졌어.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는데 뭐.... 근데 술은 못 먹어 ㅡㅡ

했다.  

그때부터 경의 막무가내 조르기가 시작됐다.  


내일은 내가  볼일이 좀 있어서 안돼,... 나와라... 네가 빠지면 무슨 재미냐 셋이 만나야지....

  경은 차로 움직이면 희네 동네에 30분도 안  걸리지만 아직 운전에 서툰 나는 전철로 움직여야 하며 역까지 걸어 나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산에 갔다 온 후라 피곤하기도 하고  샤워까지 끝낸 뽀송한 몸에 다시 또 땀을 흘리고 또 샤워하기는 싫었다.

ㅡ오늘은 둘이 만나 오붓하게 즐겨봐ㅡ

  이런 경우 경은  좀 막막 무가내로 끝까지 졸라대는 성격이고 희는 경에 비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포기해 주는 편이다. 특히 나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을 가장 많이 이해해 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래,  진 나오기 귀찮을 거야 둘이서 보자... 할 줄 알았던 희가  꽈리고추를 볶고 있는데 전화를 했다. 좀 늦더라도 나오란다.  내가  도착하는 전철역 출구 바로 앞에서  경이랑 대기하고 있겠다고...

ㅡ너까지 왜 그래.. 나 정말 나가기 싫은데...
낼 만나도 되는데 왜... 너 낼 특별한 약속 없잖아. 오늘 경이 만나고  낼 나 만나고... 갑자기 이틀이나 약속이 잡히는 게 되는구먼... 더 좋지 않아?ㅡ

ㅡ낼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지... 내 휴가를 뭐 너네들만 만나고 끝내라고? ㅡ

ㅡ너 속도 안 좋다며...ㅡ

ㅡ지금 괜찮아졌어. 술만 안 마시면 돼. 경이 차 갖고 와서 마시지도 못할 거지만...ㅡ

아프다더니 목소리가 의외로 아주 밝다.

우리는 희에게 약하다.   우리에게  있는  남편이 없어서.  결국  내가 또 졌다.

  아 진짜 둘이 좀 만나지... 귀찮아 죽겠네... 반찬 마무리 짓고 한숨 자든가 책 읽으려 했구먼.....
투덜대면서 꽈리멸치볶음을 만들고 계란장조림은  포기했다. 화장대에  앉아 산에 갔다 온 열기가 아직 다 식지 않은  붉그스름한 얼굴에 팩트를 두드려대면서도 인상을 북북 썼다.

ㅡ여섯 시 40분 도착ㅡ

전철 안에서 카카오지하철 앱으로 도착 시간을 확인한 후 톡을 보냈다.

ㅡ알았어 2번 출구로 나와.  바로 횡단보도 있을 거야. 거기서 시원하게 모실 준비하고 기다릴게...ㅡ

정확히 6시 41분에 2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횡단보도였다. 그런데 대기하고  있겠다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아  짜증 나...
전방에 또 하나의 횡단보도가 보이고 차들이 서너 대 서 있다. 저 횡단보돈가.... 나는 무겁게 터덜터덜 걸었다. 나 화났어! 를 온몸으로 시위하듯이... 그런데 두 번째 횡단보도에도 없다. 아 진짜 뭐야 짜증 나게.... 송골송골 올라오는 땀이 더욱 짜증을 부채질했다.   


그때 도착했냐는 톡이 왔다.

ㅡ도착했지... 왜 없는데!!!!


나는  내가  짜증이 엄청  났다는 표시로 느낌표를 마구 찍어댔다.

잠시 후 차가 내 앞에 와서 섰다.  창문을 열고 활짝 웃는 희의 얼굴과 운전석에서 키득대는   경의 얼굴이 보인다. 이것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야? 나는 짜증 나 죽겠구먼... 나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 거칠게 앉으며

ㅡ왜 늦은 거야? 그리고 뭐가 그리 좋냐? ㅡ

볼멘소리로 말했더니...

ㅡ너 인상 팍 쓰고 서 있는 모습이 우스워서...ㅡ

그러면서 또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몇 분 아니지만 늦은 이유는 이렇다.
내가 6시 40분 도착이라니까 40분에 도착해서 개찰해 나와서 2번 출구 찾아 계단을 올라오면 45분이겠구나 했다고... 여긴 잠시라도 차 대고 있을 곳이 없어서 딱 맞춰 왔다고...

ㅡ난 그 시간까지 포함해서 40분이라 그랬거든! 원래 35분 도착이고...ㅡ

ㅡ아 그랬군... 우린 네가 거기까지 계산할 줄 몰랐어... 왜 이렇게 똘똘해진 거야  우리 진이....


또 마주 보고 키득댔다. 희의 밝은 모습에 나의 짜증이 흐물흐물 녹았다 속없이... 희와 경은 나의 거의   40년 친구다.

희가  검색해 온 맛집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언제 짜증이 났냐는 듯 그냥 맘이 다 풀려버렸다.

흰 자기네 동네라고 미리 검색해 왔다는  한정식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희 답게 조용하고 깔끔하고 분위기도 좋은   한정식집이었다. 간장불고기 한상차림.

간장불고기는 짭조름하고 금방  한  하얀 쌀밥은 달짝지근하고 비벼먹을 수 있게 나온 다섯 가지나물반찬과 청국장은 구수했다. 너무 맛있어서  먹기 전에 배가 별로 고프지 않다고  시큰둥해하던 우리는 거의 다 먹어버렸다. 특히 속이 안 좋았다는 희가  맛있게 잘 먹는 모습에 경과 나는 언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희는 무릎 관절도 좋지 않아 지금 치료 중이다.  그래서 막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탁구는 물론 하루 5 천보  이상은 걷지 말라고 해서 그 좋아하는 산책도 자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무릎통증이 낫지를 않아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ㅡ내가 말이야 어쩌다 잠깐 든 생각인데... 너 자꾸 여기저기 아픈 거... 혹시 ㅇㅇ씨(희 남편) 때문 아닐까...ㅇㅇ씨   너 밖으로 돌아다니는 거 엄청 싫어했잖아.... 집에 있는 거만 좋아하고... 네가   안 아프고 건강하면 여기저기 막 쏘다닐  거 같으니까... 솔직히 ㅇㅇ씨 있을 때보다는 네가  잘 나가기는 하지.... 살아생전 그렇게나 싫어하는 동창모임도 나가고....ㅡ

ㅡ야 그럼 내가 연애라도 하면 뭐...ㅡ


희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ㅡ발목 부러지는 거지...ㅡ


내가 바로 받아서 쳤다.

셋이 같이 웃었다.  먼저 간 남편 얘기를 웃으면서 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정말 병도 주고 약도 준다.

이번에 나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ㅡ내 얘기는... 너  가끔 때때로 혼자 말하든 속으로 말하든... 여보 나   좀 안 아프게 해 주면 안 돼? 아픈 거 싫단 말이야... 나 아픈 거 가져가 줘... 나 건강해도 당신이 싫어할 것 같은 행동 안 해... 물론 당신 있을 때보다는  좀 더 외출을 하겠지만... 당신 나 알잖아... 이렇게.... 자꾸자꾸 말해... 내가 말했지?  우리 엄마 얘기... 우리 엄마 무릎 아파서 힘들 때... 우리 엄마  하루에도 몇 번씩 중얼거렸대잖아... 영감요... 내 무릎 아픈 거 가져 가소.... 아뱀요 어맴(시부 시모를 부르는 경북 북부지역 사투리) 요... 내 다리 아픈 거  가져가소.... 아파 죽겠니다... 가져가소... 가져가 주소.... 영감요... 어맴요....
그래서  우리 엄마 무릎 나았잖아... 그 후로  아흔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무릎 안 아파.....
진짜야 ㅡ


언젠가 몇 번은 들었을  나의 그 얘기에 희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렇게 해 보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식사 후 해가 진 군청색하늘과 갖가지 조명등으로 운치 있는 백운호수길을 잠시 산책하며 사진을 찍었다.  아파서 걱정이던 희가 제일  신나 보였고  자기가 잘 아는 동네라고 앞장서서  빠릿빠릿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아마도 우리가 찾아온  게 기쁘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아닌 음료를 한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ㅡ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ㅎㅎㅎㅎㅎㅡ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희가 올린  톡을 읽었다.

ㅡ찾아가는 친구 또한 너무 즐거웠지 ㅋㅋ
늘 고맙고 반가운 친구들
특별히 오늘 진이가 피곤한데 오가느라 고생했어ㅡ

경이 올린 톡도  읽었다.

ㅡ갈 때는 귀찮았는데 지금은 아주 기분이 좋아.... 만날 때 보다 만나고 헤어진 후에 더 기분이 좋은 관계가 진짜  좋은 관계라드라.... 우리 좋은 관계 맞는 거 같아...  

편히 쉬자 우리 ㅡ

나도 톡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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