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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Sep 12. 2023

혼술 즐기시던 아버지 생각나는 늦은밤 나의 혼술

 --그만 드시라 잔소리 대신 술친구 해드릴걸.... --


by찌니Aug 22. 2023


 아파트 정문까지  무사히 왔다. 이제 아파트 정문 바로 옆에 있는 마지막 편의점만 통과하면 된다.  마지막을 알아서인가 시원한 맥주 한 잔과 고소하고 따뜻한 치킨이라는 커다란 유혹은 벗어났는데 캔맥주라도....라는 자잘한 유혹이 옆구리를 찔러 댄다.  안돼.... 지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을 생각해 봐.... 얼마나 가볍겠어... 혈압을 생각해야지..... 일주일 후면 또 병원에 가서 혈압을 재고 혈압약을 타 와야 하는데..... 의사가 또 그럴 거 아냐?  체중을  조금만 줄여 보세요.... 그리고 곧 여름휴가도 가는데.... 좀 이쁜 사진 좀 찍어보자 어? 어?

  그런 생각들이 채찍이 되어 나를 몰아세웠다. 그 효과로 나는 무사히 마지막  편의점을 지나쳤다.  그런데  모든 유혹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검은색 망토를  두른 악마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뭘 그렇게까지 해....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까짓 캔맥주 하나만 해..... 그 정도도 안 먹고 어떻게 살아....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인생 뭐 있어? 어? 어?


   나는 결국 발길을 돌렸다. 지나쳐 온 편의점으로 다시 돌아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장 온갖 맥주가 가득한 냉장고로 돌진하여 문을 열었다.  나의 손에 간택되기를 바라며 차갑게 반들대는 크고 작은  맥주 맥주 맥주들...... 나는 특별히 선호하는 맥주는 없다. 그때그때  다르다.  음...... 오늘은 칭따오로 한다. 그런데 500cc 하나.....로는 좀 부족할 듯.... 작은 거 하나 더 살까.... 안 돼... 하나만 해.... 그래 하나만..... 아 그럼 안주는? 집에 천도복숭아가 있을 텐데.... 먹태가 좋은데.... 이 편의점에는 먹태가 없다.... 그렇다면.... 아 꼬치가 있네.... 2 + 1 직화구이 매운 꼬치바.... 맥주 안주로 먹으면 정말 맛있지....


  결국 나는 칭따오 500cc 캔맥주와 꼬치바 세 개를 사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그래.... 항복이다 항복... 행복한 항복..... 나는 원하는 과자를 손에 넣은 어린애처럼 흐뭇해하며  또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체념으로 자책도 하며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뜨끈뜨끈한 밤공기 속을 빠르게 걸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손을 씻고 홈웨어로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가 꼬치바 한 개를 레인지에 돌렸다. 하나만 먹을 거야..... 야무진 다짐을 하고 나머지 두 개는 냉장고 깊숙한 곳에 넣었다.  머스터드소스를 준비하고  식탁에 앉아 캔맥주를 땄다.  오후 3시 즈음의 늦은 점심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뱃속 저 깊숙이까지 찌르르 시원한 맥주가 퍼져나감이 느껴졌다.  소맥이면 더 짜릿했을 텐데... 아 먹다 남아서 요리할 때 쓰던 소주가 있을 텐데.... 냉장고를 열어본다. 있다. 두 잔 정도 되는 소주가 말갛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래 너를 맥주에 타서 소맥을 만들어 마셔 주마... 너도 명색이 술인데, 요리할 때 들어가는 것보다 맥주와 섞여서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낫지 않겠니??

 캔에 든 맥주를 커다란 머그컵에  따르고 소주 반 잔 정도를 섞고 얼음도 띄운다.

 캬.....

  맥주만 마셨을 때보다 확실히 더 짜릿하다.   


   술, 하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논농사 밭농사는 물론이고 인삼농사 담배농사를 거쳐 마지막엔 사과농사를 지으셨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아주 많이 즐기셨다.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늘 됫병 소주 (나는 큰 대자를 써서 '대병' 소주라고 알고 있었는데 좀 어감이 이상하여 찾아보니 대병이 아니라 '됫병'이며 1.8리터이고 1,8리터는 엣 단위로 1되를 말하는데 '1되 용량의 병'이라고 해서 '됫병'이라고 불렀단다)와 당시의 싸고 독한 담배가 세트로 놓여 있었다.  일하시는 중에는 밭머리나 논둑에 앉아 막걸리를 드셨고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시기 전에는 머리맡의 소주를 드셨고 새벽에 일어나서도 맨 먼저 담배와 소주 한두 잔을 드셨다.  


  아버지가 가장 즐긴 안주로는 두부구이.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는 머리맡에 화로와 프라이팬과 산초기름까지 들여와한 살림 차리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엄마가  농사지어 직접 만든 두부를 화롯불에 프라이팬을 달궈  산초기름에 구워 드셨다. 때문에 할머니와 엄마는 콩을 불리고 맷돌에 갈아 장작불 훨훨 타는 가마솥에 두부 만드는 일이 거의 일상이셨다.  덕분에 지금 구순에 가까운 엄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내려간다고 하면 실컷 먹고도 가지고 올라올 만큼 두부를 많이 만들었다.  

  엄마는 술 담배를 즐기시는 아버지가 냄새나고 지저분하다며 못마땅해하면서도 두부는 참 열심히도 만드셨다.   그러나 술과 담배와 나중엔 격한 기침과 가래까지 끓는 아버지와의 잠자리까지는 힘드셨는지 자다가 말고 일어나 불만을 터뜨리며  윗방으로 옮겨가 주무셨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어스름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거나 잠에서 깨어나 잠깐  마당에 나가보면 아버지 방에서도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새어 나왔던 날이 많았다. 기침소리와 덜그럭거리는 그릇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는데 나와 아버지만  깨어있을  것 같았던 그  많은 새벽의 짧은 시간들이 뼈아픈 후회로 남았다. 가끔은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아버지 안 주무셔요? 제가 술 한잔 따라 드려요? 힘드실 텐데  얼른 주무세요... 그렇게 다정하게 말 걸어 드릴걸......
  아버지 나이 환갑을 넘으면서부터는 다 큰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끊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줄이시라  자주 말씀 드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먹고 싶은 거  안 먹어 가면서까지 오래 살 생각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피우면서 살다 가련다..... 하시며 독한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속에 것이 되나올 것 같은 격한 기침을 하신 끝에 옆에 재떨이를 끌어다 누런 가래를 뱉어내셨다.  
  그러면 우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돌아서 우리의 배우자와 아이들에게로 가버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아버지의 칠순 생신 잔치를 어떻게 할까 의견을 나눌 즈음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3개월의 입원생활 후 집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  알코올을 잘 받아들이는 체질을  오빠들이 아닌 나한테만 물려주셨다.  듣지 않으시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늙은 아버지께 술 좀 줄이시라 담배 좀 줄이시라 성화 부리는 대신  아버지 옆에 앉아 술을 따라 드리며  같이 마시기도 하며 말동무를 해 드렸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런 후회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나 들었다.  성정이 무뚝뚝하고 완고하고 엄해서 어릴 때는 무서워했고 스무 살이 되어서는 집을 떠나 살았고 결혼 후에는 저마다 살기 바빠 거의 잊고 살았던 나의, 아니 우리의 아버지.....  대가족을 거느린 가난한 농군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오로지 술과 담배로 달랬을 아버지.......

  이런 생각조차도  간혹  살아계셨으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은 노인을 만났을 때나  드는  나는, 아니 우리는 모두 별 수 없는 무심한 자식들이다.


  나는 그날 밤  다시 편의점에 뛰어나가 500cc 하나를 더 사 와서 마셨으며 매운 꼬치바도 세 개를 다 먹어버렸다.  자정 가까이 되어 남편이 귀가했을 때 나는 약간 붉고 젖은 눈으로 소파에 누워 반쯤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알코올을 잘 받아들이는 체질뿐만 아니라 외로움도 나에게만 물려주셨나.... 아니 이건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 이다.  우겨서라도 고독, 이라 하고 싶다.


 -- 외로움은 나도 모르게 쓸쓸한 마음이 만들어지고, 고독은 자신이 만들어 즐긴다. 외로움은 저절로 찾아오지만 고독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고 고독은 즐길 수 있으면 즐기는 게 좋다(네이버)---


   아버지, 아버지도 외로웠던 게 아니라 고독하셨던 거죠?  


  다음날 아침 일어나 혈압계를 재 보니 150이 넘었다.  저녁만 아니 술만 먹지 않아도 혈압은 120대로 뚝 떨어지는데......   그게 그렇게나 어렵다.  태산을 옳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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