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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Sep 12. 2023

'휘떼'는 판타지로 남겨두고 콩국수나 먹으러 가자

 -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by찌니Aug 18. 2023


 저녁 뭐 먹을까?
 
 또 식사 때가 되었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뭐라도 해서 먹고 먹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은 아무리 무덥고 귀찮아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저 유명한 '김훈' 작가님이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밥 하기의 지겨움'은 아실까?? 
 
  저번주 주말에는 초복인가 중복이라 해서 삼계탕으로 외식했으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서 대충 해 먹을까.... 너무 더워서 집 나서기도 귀찮고.....
 
  내 머리는 냉장고 구석구석을 뒤적인다.
 
  돼지고기랑 두부 듬뿍 넣고 김치찌개 할까....  저번에 산에 갔다가 사온 가지랑 부추도 남았는데 …..  (핸드폰을 뒤적뒤적) 가지전 한번 해볼까?  가지는 삶아서 무쳐먹거나 기름 듬뿍 넣어 볶아 먹거나 냉국으로만 해 먹어 봤는데 가지전이라.... 음..... 간단하네…. 부추랑 호박도 있으니까 이왕 호박전도 같이 해볼까 … 아  오징어도 있으니까 김치전 해도 되겠네…. 비도 오락가락하는데…..
 
 그렇게 머릿속 생각만으로 이것저것 다 하면서 소파에 퍼져 앉아 일어날 줄을 모른다.
 
뭐 할까? 어? 어?
 
 EBS 여행프로를 보고 있는 남편을 쿡쿡 찔러본다.  화면에서는 젊은 여자가 이국의 푸르고 싱그런 숲 속 길을 걷고 있다. 화면에 '북유럽전문여행가 ㅇㅇㅇ '이라는 글이 떴다가 지워진다.  여자는 '저는 오늘 노르웨이 친구의 초청으로 노르웨이의 여름 별장  '휘떼'를 체험해 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며 이어 숲 속에서 다가온 금발의 외국인 여자와 반갑게 안으며 인사한다.  대답 없는 남편과 함께 나도 한동안 입을 다물고 티브이를 시청한다. 
  ‘휘떼’는 노르웨이어로 ‘오두막’또는 '별장'이라는 뜻으로 통나무로 지어진 노르웨이의 전통가옥이며 자연 속에서 휴식을 즐기는 공간이란다. 노르웨이 인들은 대부분  전기나 수도시설 없이  조금은 불편한 상태로 오로지 자연 속에서 한 달의 휴가를 보낸다고 한다. 화면은  바뀌어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호수에서 양동이에 물을 떠 와서 주전자에 부은 다음 성냥으로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서  물을 끓이는 모습이 나온다.  그렇게 끓여 만든 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휘떼  가까운 넓고 맑고 고요한 강가에 나가  앉아 조용조용 얘기를 나누며 또 침묵하며 음미하듯 천천히 마신다.
  
  몇 년 전 초가을 즈음 친구 소유의 산골 집에 1박으로 놀러를 간 기억이 났다.  작은 소읍에서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고 또 가야 하는 오지에 가까운 곳이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허름한 시골집이었다. 거의 10여 명에 가까운 친구들이 바리바리 먹고 마실  것을, 몇 대의  승용차 가득  싣고  들어가서 밤새도록 먹고 취하도록 마시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춤췄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놀고 돌아오면 며칠 동안 스트레스도 날아가고 힐링도 한 듯  개운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오히려 기름 떼가 낀 듯  개운하기는커녕 뭔가 알 수 없는 후회와 허무로 오리려 우울했다. 분명 젊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것도 나이 때문일까. 아니다. 나만의 성향일 것이다.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그런 유흥에  적극적인 친구들이 더 많다. 조금 있으면 놀고 싶어도 못 논다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노래도 있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그런 유흥의 기회가 오면 단호히 거절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망설이기는 해도  결국은 합류해서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 다른 이들보다 더 신나게 논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내가 진정 원하는 건 사실은 그런 게 아니야.... 혼자서 괜히 고뇌하는 척이나 하고.... 반백년을 넘게 살아도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이해할 수 없다.   맘 맞는 친구 한 명이랑 '다음엔 꼭 조용히 둘만 와서 조용히 쉬다가 가자'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몇 년째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냥 짜장면 시켜 먹을까? 귀찮아 밥 하기.... 
 
  남편에게 하는 말인 듯 혼잣 말인 듯 중얼거리며 계속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한 집안의 소파에 더 깊이 눕다시피 앉아 계속 티브이를 본다. 화면 가득 노르웨이의 대자연이 펼쳐지고 그 모든 걸 온몸으로 경험하고 즐기는 젊은 여자의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멋있다 정말....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이번 생은 글렀네 글렀어...  이렇게 집안에서 티브이로나 시청하고….. 다음 생에서나 기대해 볼까…. 다음 생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린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펼치면  첫 문장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우리에게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판타지로 간직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멀리 달아나고 싶어 하는 사람일수록 실은 현실에 머무는 시간이 더 깁니다. 그렇지 않다면 판타지는 깨지겼지요.
 
 나는 경험하지 못한,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저 노르웨이의 자연과 '휘떼'는 판타지로만 간직해야 되겠지..... 이렇게  소파 위의  현실에나 머물면서. 
  
  여행프로가 거의 끝나갈 즈음 남편이 말한다.
 
  "시원한 콩국수나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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