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두 꼬집 눈물 한 꼬집

by 찌니



의정부에서 제부와 함께 치킨가게를 운영하는 동생은 가게 문을 닫는 새벽에 바로 출발해서 벌써 엄마집에 도착했다고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빨리 출발하라고 성화였다. 어제도 자정 넘어 귀가한 아들을 깨워 차 뒷좌석에 태우고 아파트를 나와서 일단 파리파게트에 들렀다. 케이크를 사면서 엄마의 나이가 88세인지 89세인지 헷갈렸다. 잠시 따져보니 88세였다.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불어 낙엽이 흩날리는 날씨였다. 케이크를 사서 다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자동차 계기판에 타이어 공기압 경고 표시등이 켜졌다고 다. 다른 문제는 없기를 바라며 자동차수리점으로 차를 돌렸다. 수리점 사장은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 때문에 타이어 공기압이 빠졌다고 타이어 네 개에 공기압을 주입하면서 묻지도 않은 공기압에 대한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람들이 긴 옷으로 바꿔 입듯이 자동차도 계절과 날씨에 맞춰서 점검을 해 주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하도 설명을 자세히 친절하게 해 줘서 집에서 갖고 온 귤 세 개를 드렸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동생이 몇 시에 도착하냐고 전화를 해왔다. 두시 반 도착으로 나오는데 차가 막히면 더 걸릴 수도 있다네… 했더니 에이 점심 같이 먹으려고 했더니… 하면서 아쉬워했다. 유독 정이 많은 동생의 아쉬워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좀 미안했다.

차창 밖은 노랑 초록 연두 갈색과 붉은색 등으로 알록달록했다. 가을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의 자동차로 도로는 꽉 찼다. 북적이는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씩을 먹었다.


세 시간 반 만에 고향 ㅇㅇ시 ㅇㅇ면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길 몇 개를 도니 야트막한 밑에 단층 슬레이트 지붕의 엄마집이 보였다. 담이 없는 넓은 마당엔 자동차 두 대가 서 있었다. 가까이 오는 차의 엔진소리를 듣고 언니가 먼저 주차된 자동차 사이로 걸어 나왔다. 언니는 엄마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서 산다.

언니는 작년보다 더 엄마 모습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차창을 열고 언니를 향해 “엄마~~~~” 하고 소리쳐 불렀다. 언니가 돌아보며 웃고 마루 쪽에서 엄마와 동생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차를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렸다. 엄마와 동생과 형부가 마루에 앉아 있고 피곤한 모습의 제부가 막 방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내 뒤를 남편과 아들이 따라왔다. 시골 노인네 치고는 아직 검버섯도 없고 피부가 매끈한 걸 자랑하던 엄마의 얼굴에 어인 일로 검버섯이 피어나 얼룩덜룩했다.

"엄마, 얼굴이 왜 이래… 땡볕에 나가서 일 많이 했어? 없던 검버섯이 왜 이렇게 많이 났어… 이제 밭일은 하지 말랬지 엄마...."

마루에 앉아 함박 웃으며 환영의 뜻으로 두 팔을 벌리는 엄마를 향해 나는 안쓰러움을 숨기느라 큰 목소리로 호들갑스럽게 왕왕대면서 다가갔다. 엄마는 나를 일별 하고는 내 뒤를 따라오는 남편과 아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나를 볼 때보다 더 기쁘고 환한 얼굴이었다.

시끌벅적하게 오랜만에 만난 인사를 서로 나누었다. 이번 엄마 생신엔 내 아들 외에 8명의 손자손녀들과 특히나 둘째 오빠네가 못 왔다. 둘째 오빠는 지난 8월 이마트 광교점 조선두부 점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분위기메이커인 둘째 오빠도 없고 남편도 건강에 태클이 걸려 금주령을 받은 상태이니 이래 저래 이번 엄마 생신날은 여느 생신때와 비교해서 조용할 것 같았다.

둘째 오빠 못 와서 엄마 많이 섭섭하겠네... 했더니 옆에서 동생이 엄마 운다고 둘째 오빠 얘기 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며 속삭였다. 그래도 이미 늦었다. 내 말을 들은 엄마의 눈가가 금방 젖어들었다.


"그러게 왜 자꾸 취직하라고 그랬어? 엄마가 자꾸 다시 취직하라고 그래서 취직했잖아…. 이런 날 오지도 못하고.. "


언니가 울먹이는 엄마에게 쏘듯이 한마디 했다. 맏딸인 언니와 엄마는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그 둘에게는 나나 동생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믿음과 든든함과 끈끈하이 있다.


"그래도 아직 취직해서 돈 벌어야지… 여기 자주 내려오면 나야 좋지만 아직 늙은 어미랑 노닥거리면서 친구나 만나고 돌아다니면 안 돼… 친구가 좀 많아야지... 그렇게 돈 막 쓰고 돌아다니면 안 돼 아직..."


일 안해도 쓸 돈 충분하다고 해도 엄마 마음은 확고부동했다. 예순도 되지 않은 오빠가 퇴직하고 엄마에게 자주 내려오는 것을 엄마는 이렇게 마냥 반기고 품어주지만은 않았다. 엄마는 지금 당장 아들과 함께 하는 당신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보다 당신이 보기에 아직 젊고 한창인 아들의 시간과 미래를 걱정했던 것이다. 둘째오빠가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이 이런 엄마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저녁은 같은 동네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첫째 오빠네 집 야외테이블에서 장어와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올케언니가 이번에도 정성스럽게 준비를 많이 해 놓았다.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만 만든 각종 쌈채소와 고추와 된장찌개와 쌈장과 김치와 반찬들을 우리는 올해도 환장하게 잘 먹었다. 마지막으로 삼겹살과 장어를 구워 낸 불판에 첫째 오빠가 직접 볶은 볶음밥도 싹싹 긁어 다 먹어치웠다. 특히나 졸지에 아홉 명 손주들의 대표로 참석한 꼴이 되어버린 아들이 어색할 것 같은 외가 어른들 사이에서 술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고 묻는 말에도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잘하는 등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어색하게 쭈삣대며 뒷전에서나 맴돌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기우였다. 취직한 지 6개월, 이름을 대면 알만한 기업에 취직한 것도 아들의 활기찬 행동에 한몫했을 것이다.


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실컷 먹고 떠들고 설거지도 같이 한 다음에는 또 그 넓고 편한 오빠집을 놔두고 좁고 불편한 엄마 집으로 다들 돌아왔다. 우리의 유년이 곳곳에 스며있는 낡고 오래된 엄마집은 아직 우리에겐 엄마의 품이고 그늘이다.

윗방에는 형부 남편 제부 아들이 아랫방에는 엄마와 언니와 동생과 내가 잠자리를 잡았다. 밤 10시도 안 된 시간, 도시에서는 아직 활기찰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난 언니와 동생과 나는 어둠 속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다행히 엄마는 귀가 약간 어두워서 우리가 옆에서 떠들어도 잘 주무셨다. 틀니를 뺀 엄마는 영락없는 외할머니였다. 우리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치아가 한 개도 없어 음식을 먹을 때는 긴 턱이 아래위로 바삐 움직였고 잠들어 있을 땐 입이 함몰된 듯 움푹 꺼져 있었는데 틀니를 뺀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와 너무도 똑같았다. 심지어 틀니를 뺀 후엔 목소리까지도 똑같았다. 그 모습은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 모습일 터였다.

새벽 4시 무렵 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이 보석처럼 박혀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올려다보는 시골의 밤하늘 밤별들을 고개를 뒤로 꺾고 한참을 올려다보다가 살얼음같이 맑고 찬 새벽공기에 쫓겨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방안에서는 내 육친들의 코 고는 소리와 숨소리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대충 씻고 또 우르르 오빠네 집으로 갔다. 주방에는 올케언니가 농사를 지으면서 조금씩 며칠에 걸쳐 준비한 음식들이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소고기미역국에 잡채 사라다(샐러드) 조기구이 갈비찜 각종 나물반찬(가지, 콩나물, 박나물 삶은 배추무침, 고사리) 알맞게 맛이 밴 배추김치, 삭힌 고추무침, 문어, 꼬지, 동그랑땡(냉동 아님), 깻잎 전, 북어포무침…….

특히 언니와 동생과 나는 올케언니의 나물반찬을 환장하게 좋아한다. 흰쌀밥 위에 나물을 듬뿍 얹고 고추장이 아닌 집에서 만든 간장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비벼 먹는다. 우리 지역만의 별미다. 심심한 듯 고소하고 짭조름한 나물간장비빔밥.


식사가 끝난 후 케이크 점화식이 있었다.


언니와 우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식사를 하기 전 음식을 다 차린 상 위에서 케이크에 불을 붙이자고 했지만 엄마의 고집으로 식사 후로 미뤄졌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고집이 세다. 아직도 우리의 뜻에 따르지 않고 당신 뜻대로, 가끔 막무가내 화를 내면서까지 밀어붙인다. 다리를 다치고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오빠가 양동이를 집어던지며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했다.

시집오기 전 엄마는 너무도 일찍 과부가 된 외할머니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몸종을 거느리고 살았다. 특히 부잣집인 외가의 비호 아래 당시로는 드물게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홀어머니에게 자란 것이 약점으로 작용한 것인지 말도 못 하게 가난한 이름뿐인 양반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와 혼인했다. 그래서 약간의 방약무인(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있음)과 고집스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방약무인과 고집으로 엄마는 그 말도 못 할 가난 속에서도 가난에 찌들지 않고 철없이 당당하고 밝았다.


대표적인 일화가 집에 불을 지른 것이다. 사는 집이 하도 귀신같아서 집에 불이 나면 새 집을 지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불을 질렀단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마을 사람들의 협동으로 불길은 금방 잡혔고 집은 더욱 귀신스러워졌다. 나중에 불낸 사람으로 엄마는 당시 서너 살이었던 둘째 오빠를 지목하는 현명함(?)을 발휘했다나… 그래서 둘째 오빠는 한동안 집에 불 낸 녀석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았다. 나 안 그랬는데... 나 불 안 냈는데... 아무리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며느리인 엄마가 불을 질렀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언니가 중학생일 때, 군사부일체의 잔재가 남아 있는 당시의 어렵고 권위 있던 선생님을 혼쭐 낸 일화도 있다. 당시의 학생들은 농한기 때 단체로 농사일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어느 날 엄마는 논에 들어가 철벅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언니를 봤다고 한다. 이에 엄마는 당장에 선생님을 찾아가서 집에서 구정물에 손도 안 묻히는 애를 왜 논바닥에 넣어놨냐고 거머리라도 붙어 상처라도 나면 어쩔 거냐고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엄마는 엄마 자신이 귀하게 커서인지 우리에게 농사일이나 집안일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아이들도 농사일에 한몫의 노동력을 제공하던 당시의 농촌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공부보다는 부모의 농사를 돕는 일이 우선인 온통 까무잡잡하고 지저분한 시골 아이들 틈에서 우리는 눈에 띄게 뽀얀 어린이로 자랐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시동생들과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본인이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혼자 집으로 돌아와 마실을 가기도 한 엄마였으니 생각해 보면 그런 며느리를 둔 할머니는 얼마나 복장이 터졌을까 싶다. 그러나 그런 엄마임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오냐오냐 하면서 귀해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온 엄마의 성정은 아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 엄마의 성정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올케언니에게 항상 더 고마워한다. 우리는 대놓고 말한다. 우리 엄마 같은 시어머니랑 나는 못 살 것 같다고.


케이크 가득 초를 꼽고 불을 붙이고 삥 둘러서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껐다.

다음 순서로 축하금 전달식이 있었다. 매년 축하금의 경리일은 늘 둘째 오빠 몫이었는데 이번에는 형부가 했다. 할머니 축하드립니다, 하면서 아들이 먼저 봉투를 드린다. 그러면 엄마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봉투를 받고 옆의 형부에게 건넨다. 형부가 봉투를 열어 돈을 꺼내며 금액을 말하고 봉투에 준 사람 이름과 금액을 적는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 삼아하는, 엄마 생신 축하연의 가장 유쾌한 하이라이트다. 엄마는 특히 내 아들인 외손자의 봉투에 무한한 감동을 나타냈다.

축하금을 다 받은 다음에는 또 엄마의 용돈 전달식이 있다. 와줘서 고맙다면서 받은 돈에서 오만 원이나 십만 원을 다시 각자에게 나누어 준다. 안 받으려고 하는 건 절대 통하지 않는다. 누구는 오만 원 누구는 십만 원을 나누어 주는데 그 기준은 엄마만이 안다. 나는 왜 오만 원이냐고 누가 장난 삼아 항의라도 하면 엄마는 내 맘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 모든 과정에서 눈물을 찔금거릴 만큼 웃고 떠드는 유쾌한 시간이다. 돈이 오고 가는 자리지만 누구 하나 상처받는 일은 절대 없다.


그다음 순서로 우리 세 자매는 올케언니에게 또 준비해 온 봉투를 준다.


올해도 우리 언니 엄마 생신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사랑해요…


이런 달달한 인사는 막내인 동생만 하는 동생의 몫이다.


식사와 케이크 커팅과 커피타임 후 다 함께 설거지를 끝내고 부석사에 갔다. 부석사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건축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박사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라는 글로도 유명한 곳으로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애초에 점심은 부석사에 갔다 온 후 부석사 밑 한정식집에서 먹기로 했는데 올케언니가 한 음식들이 너무 맛있고 많아서 다시 집에 와서 먹기로 했다. 좋은 계절이니만큼 부석사는 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가까이 살아도 정말 오랜만에 온다고 오빠와 올케언니는 말했다. 특히 이런 예쁜 가을날은 처음인 것 같다고 말하는 올케언니의 얼굴은 즐거우면서도 씁쓸해 보였다. 그만큼 지금까지 정신없이 바쁘고 여유 없이 살아왔다는 뜻이기에 같이 걷는 우리의 마음도 잠시 씁쓸해졌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소풍으로 자주 오던 곳이기도 했다. 일주문까지 걸어가는 오르막의 긴 길은 누렇게 물든 은행잎 천지였다. 소백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가을날의 부석사는 오랜만에 봐서인지 더욱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걷는 게 힘든 엄마가 절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서 다시 내려와야 했다.


부석사 아래 카페어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또 점심상을 차렸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주방에서 올케언니가 싸가지고 가라고 내놓은 반찬들을 싸느라 부산을 떨었다. 나물반찬에서부터 배추김치 파김치 고추장아찌 매실장아찌 쑥떡과 남은 나물반찬까지 봉지봉지 쌌다. 아... 육개장까지….

마당에서는 첫째 오빠가 고구마와 사과를 양껏 가져가라고 펼쳐놓았다.


오빠네와 작별한 후 다시 엄마집으로 이동해서 엄마가 만든 된장과 간장과 참기름 들기름 들깨와 가마솥에 오려 푹 끓여 냉동실에 꽝꽝 얼여놓은 곰국도 골고루 나눠 실었다. 저마다 차의 트렁크를 채웠다. 제부가 딸은 다 도둑이라더니... 하면서 어이없어했고 엄마는 마루 끝에 앉아서 그래도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하지 내 없어 봐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말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엄마를 혼자 두고, 눈가가 붉어지는 엄마를 두고 우리는 애써 웃으면서 차례대로 엄마집에서 멀어져 갔다.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엄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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