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낙엽이 모래시계 속에서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모래 같고 반라의 나무들이 비어 가는 모래시계 같다. 떨어지는 낙엽도 모래시계 속 모래도 떨어지거나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인다. 떨어지고 빠져나가는 것만큼 밑에 쌓여 가는 것도 눈에 보인다.
실제의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고 그냥 사라지고 있다. 어디로 사라질까.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질까 아니면 광활한 우주의 블랙홀로 사라질까. 아니 어쩌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4차원의 세계에 쌓이고 있는건 아닐까. 내게서 빠져나가는 나의 이 시간의 퇴적들은 결국은 버려지고 잊히고 말 찌꺼기들일까 아니면 한 번쯤은 재활용이 가능한 거름이 될 수도 있는 퇴적들일까.
낙엽들로 어지러운 길 위에 서면 일부러 길의 가장자리를 피해 낙엽들이 많이 쌓여 있는 구석진 길이나 길가 공원길이나 나무 밑을 골라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걷는다. 낙엽 밟는 행위와 낙엽 밟히는 소리와 신발 밑창을 뚫고 들어온 발바닥의 낙엽 감촉이 발길을 붙잡으면 어린아이처럼 나무 밑을 몇 바퀴 돌기도 한다. 마음이 수행자처럼 가라앉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들뜨기도 한다. 초조해지기도 하고 의연해지기도 한다. 이미 모든 게 끝났다고 체념하는가 하면 아직은 아니라는 기대가 다시 고개를 들기도 한다. 계절이 가고 오고 깊어지고 또 가는 것에 대하여.
토요일에는 친구들과 북한산 숨은 벽 단풍산행을 다녀왔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단풍은 그 오색찬란한 절정의 현란한 아름다움을 지나 조락의 기운으로 차분해져 있었다. 동행한 친구는 좀 더 일찍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지만 나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그 덧없음을 알기에 너무 아름다운 모든 것은 어쩐지 위태로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동반했다. 반라의 나무들은 가볍고 의연해 보였고 바위틈에 계곡틈에 빼곡하게 쌓여 있는 낙엽들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서정주 시인은 '푸르른 날'이라는 시에서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 고 했다. 그 단풍이 또 지쳐서 낙엽이 된 것이겠지.
가파르고 험난하지만 짧은 코스라 오후 세시 무렵 하산하여 소주와 아귀찜으로 일차를 하고 맥주와 골뱅이와 먹태로 이차를 했다. 오랜만에 술을 꽤 마셨다. 얼굴에 잠시 단풍이 든 듯 붉고 홧홧해지기도 했지만 금방 낙엽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일요일에는 출근한다고 나와서 도서관에 갔다. 책을 펼쳐 놓고 거의 엎드려서 잠만 잤다. 퇴사를 속이고 생활한 지 7개월 여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지쳐가나보다. 곧 끝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무딘 남편도 자기 삶 건사하기도 힘든 아들도 끝까지 알아차라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내가 지쳐 내 스스로 실토하게 되겠지... 퇴근시간에 맞춰서 집에 들어가니 남편이 말했다.
"꼭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것 같네..."
살짝 당황하고 뜨끔해서 그래? 진짜로 여행을 갈 때가 된 건가? 라는 말로 응수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인듯 했기 때문에 남편이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남편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의 출근룩이었던 가을 코트나 재킷을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았다. 거의 톡톡한 맨투맨티에 패딩조끼 통바지 를 입고 백팩을 메고 다니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가끔은 코트를 입어줘야 하나 싶다가도 뭐 그렇게 까지...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서가를 어슬렁거리다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책을 꺼내 펼쳤다. 명성은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 주제의 거대함과 웅장함에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책이었다.
35페이지까지 짧은 발췌문이 나오고 이어서 '1장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들'이 시작되었다.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입매가 험악하게 굳어질 때, 내 영혼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축축한 11월 같아질 때, 나도 모르게 관을 파는 상점 앞에 멈춰 선다거나 마주치는 장례 행렬의 후미를 따라갈 때, 그리고 특히 극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부러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차례로 쳐서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면 엄청난 도덕심을 발휘해야 할 때, 그럴 때면 최대한 서둘러 바다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 영혼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축축한 11월 같아질 때' 란 평범한 문장에서 잠시 시선이 멈췄다. 비단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내일이 바로 그 11월이 시작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쩐지 이번엔 이 거대하고 웅장한 소설을 다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슈미얼이 바다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듯이 나 또한 어디든 떠나야 할 것 같아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