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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Nov 03. 2023

괜히 눈물이 났다


  인터넷 약정이 만료되어 재가입을 하면서 오전 11시 무렵 기사가 방문하기로 했다. 기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 보이는 어리고 앳된 남자애였다.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 식탁에 있던 귤 네 개를 가면서  먹어요, 라고 말하며 주었다. 남자애가  장비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어 받으며 감사히 잘 먹겠다고 함박 웃었다. 덩달아 나도 함박 웃었다.  


 날씨는 매우 흐렸다.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했다. 길고 쓸쓸하고 외로운 길을 떠날 준비를 끝낸 자의 뒷모습 같은 날씨다. 그래서 11월은 좋으면서도 싫다. 싫으면서도 좋다. 핑계 삼아 집에 그냥 있기로 했다.

 

  모비딕 1 책이 펼쳐진 독서대를 식탁으로 옮겨 놓고 미역국과 계란장조림 두 개와 김치를 차려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식탁을 치우고 이번에는 독서대를 거실 탁자 위로 옮겨 놓았다. 1장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들, 2장 여행 가방, 3장 물기둥여인숙, 4장 이불, 5장 아침식사..... 이렇게 한 챕터가 짧게 끝나서 의외로 잘 읽혔다. 더구나 내 영혼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축축한 11월 같아질 때, 사교적인 아침식사 자리에서 마치 그린산맥의 우리에서 평생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소심한 양들처럼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땅 위에 발을 내려놓지 않는 갈매기가 해가 지면 날개를 접고 흔들리는 파도 사이에서 잠을 청하듯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로 나온 넨티킷 사람들은 해 질 녘이 되면 돛을 접어 올리고 베개 바로 아래로 바다코끼리와 고래가 떼를 지어 돌진해 가는 곳에서 잠을 청한다 등과 같은 메모하고 싶은 서정적이고 유연한 문장들이 많아서 두 세번 소리내 읽기도 했다. 


  졸려서 소파에 길게 누웠는데, 거실 바닥에 앉아 있다가 소파로 옮겨 누운 그 잠깐의 움직임 사이에 무슨 신체적 정신적 변화가 있었는지 잠이 달아나 버렸다. 눈을 감고 한참을 있어도 잠은 오지 않고 뜬금없이 냉장고 안의 멸치간장볶음이 불쑥 떠올랐다. 멸치볶음은 가끔 너무 딱딱해서 실패하는 반찬이다. 어딘가에서 물에 잠깐 담갔다가 하면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완전 멸치가 다 으스러지고 맛도 없었다. 포항인가 어디 바닷가에 여행 가서 사 온 맛있는 멸치여서 버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고추장을 넣고 다시 볶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꼭 냉장고 안의 멸치볶음이 재생시켜 달라고 부른 것처럼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한참을 요리에 열중했다. 다행히 고추장 멸치볶음은 맛이 훨씬 괜찮아졌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넣고 휘리릭 섞었더니 그 고소한 내음이 식욕을 자극했다. 선 채로 금방 한 멸치고추장볶음과 조미김을 해서 밥을 먹었다.


 그때 갑자기... 내 안에서 누가 주먹이라도 내지른 것처럼 훅, 하고 뭔가가 치받쳐 올라왔다. 이어서 눈앞이 흐려지더니 눈물이 고였다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런 이런 아직도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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