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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Nov 22. 2023

 나의 생일날은 쓸쓸했지만

   나는 카카오톡이나 밴드에서 자동으로 알려주는 생일 알림을 차단해 둔 지 오래되었다.  심지어 오 남매 가족밴드에조차도 차단해  두었다. 나의 태어남이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빈말이라도 축하한다는 말이 어색하고 민망하고 싫다. 그러니까  나는 좀 비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자존감이 낮다. 밝음보다 어둠을 지향하며 해피앤딩보다 섀드앤딩을 선호한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내가 언제부터 어쩌다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유전적으로 외향적인 엄마보다 내향적인 아버지의 피를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각종 성격 테스트를 해 보면 나는 철저한 내향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고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 남들에게 보이는 나는 철저히 외향인이며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절저히 내향인인 것이다. 


   한 때는 '생일주간'이라고 해서 생일날이 들어 있는 일주일 내도록 만남과 모임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만큼 다른 이들의 생일축하 모임에도 쫓아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관계가 많이 정리되었고 외향보다도 내향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많이 든다. 요즘이 특히 그렇다.  타인이나 외부적 요인에 덜 휘둘린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이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젊은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도 아직 두 세명의 친구들은 생일날 아침마다 축하 문자를 보내 주고 언니나 동생도 가끔 기억해 주고 작년까지만 해도 한 두 개 생일모임을 가졌었다. 올해도 두 명의 친구가  내 생일축하 모임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나의 무반응에 쑥 들어갔다.

 

   같이 사는 남편과  아들에게도 특별히 내 생일을 축하받고 싶은 맘이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가기아쉬우면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생일을 보냈다. 

  일주일 전쯤에 내가 나의 생일날을 알려 주면 시간을 맞춰서 하루 저녁 다 같이 외식을 했다. 생일날에는  주로 아들이 사 오는 케이크에 촛불을 붙여  남자의 어색한 생일축하 노래를 들은  후 불을 끄고 배달시킨 치킨이나 피자를  맥주나 와인과 함께 먹는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별거 없는 생일을 보냈다. 물론 남편이나 아들 생일날에도 비슷했다.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었던 거 같다.

  생일날 꼭 내가 알려줘야  하지만  아들과 남편 생일날은 내가  기억해 두었다.  어쩌다 생일날이 주말이면 갈비찜과 잡채 등으로 그럴듯한 생일상을 차려 내기도 했다.  

  남편에게 갖고 싶은 것을 콕 집어  요구해서 생일선물을 받아낸 적도 있고 아들이  필요한 거 사라고 돈을 준 적도 있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말하지 않을 거라고 내 생일을 달력이나 핸드폰 일정표에 표시해 두라고 남편과 아들에게 말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건성으로 알았다고 대답만 할 뿐이라는 걸 알기에 다음 해에도 내가 먼저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다 보니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무심함이 전혀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남편이 일찍 일어나 서투르나마  생일상을 직접 차려 줬다거나 아들이 미역국을 끓여 줬다는 다른 사람들의 생일 이벤트를 접하면 잠깐 나는 뭔가 너무 한 거 아닌가 이 두 남자에게 나란 존재가 이거밖에 되지 않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남들과 비교를 해가면서 섭섭함은 토로하기도 지만 그뿐이었다.  금방 생각이 뒤집혔다.   생일 따위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지난해  나의 생일 케이크

  


  올해는 나까지도 나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 나는 옛날사람답게 음력 생일을 다.  핸드폰에 다른 사람들의 생일 알람이 뜨면 아 나도 이맘때쯤인데... 하고 생각은 했지만 굳이 큰 양력의 날짜 밑에 이젠 안경을 써야 겨우 보이는 작은 음력의 날짜를 확인하고 표시해 두지 않았다. 전날 엄마의 전화가 와서야 나는 나의 생일을 알게 되었다. 아... 내일이 내 생일이구나...라고.  

   엄마는  돈 10 만원을 통장으로 보냈다면서  꼭 소고기 사서  미역국 끓여 먹으라 하셨다.  이제는 늙어서 돈 쓸 일도 별로 없다면서 우리 다섯 남매들 생일을 이렇게 꼭 챙겨주신다. 우리 어릴 때 못해준 걸  지금이라도 해주고 싶다신다.


  생일이 바로 다음 날인데 우리 집 두 남자는 그 어떤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올해도 내가 미리 옆구리를 찔러야만 하는 거였다. 내가 내 생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입이 근질거려서라도 미리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나의 생일날을 잊고 있었고 생일축하는 당겨서는 해도 지나고는 하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으니 말할 때를 놓치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 전화를 받은 후 단톡에 '내일이 내 생일이야'라고만 올렸어도 누구라도 적어도 케이크 정도는 사들고 들어올 것이고 외식이라도 하자고 날짜를 조율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에는. 옆구리를 찌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변함없이 일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요즘 나의 마음은 아주 많이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늦도록 멍하게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집을 나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이맘때쯤이면 창궐하는 우울과 게으름과 나태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나의 나약한 '의지' 를 좀먹어 들어 가지만 나의 강력한 의지만이  유일한 백신인 고약한 바이러스. 생일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나의 태어남이 무슨 축하받을 일이라고....







  토요일, 나의 생일날 아침,  

  두 남자는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도 끝내 옆구리 찌르지 않았다.  두 명의 친구에게  축하 문자를 받았다. 가족의  축하  듬뿍 받고 맛있는 거 먹는 행복한 시간 보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래 그래.... 고마웡....' 하고 답글을 보냈다. 작년엔 커피나 케이크의 카카오선물도 주고받은 것 같은데 올해는 그마저도  없어졌다. 내 무심함과 무성의를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니 조금도 섭섭하지는 않았다. 나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섭지 않다. 


  엄마 말대로 소고기 듬뿍 넣고 미역국은 끓였다. 남편은  아침 일찍 등산 갔고 아들도 약속이 있다고 일찍 집을 나갔다.  미역국은 그래서 나 혼자 먹었다. 그리고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도서관에 갔다.

 

  나는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엘레나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중 제1권 <성가신 사랑>을 다 읽고 제2권  <버려진 사랑>을 읽기  시작했다. 버려졌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버려진 사랑>을 읽다 보니 어쩌면 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서 버려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버려졌거나 방치되었거나....  그렇더라도 이 또한 내가 자초한 일일 터.  참 묘하고 씁쓸한 우연이었다.

  책까지 잘  읽히지 않았으면 서글픈 생각에 빠졌을 텐데 다행히 책은 잘 읽혔고 노트에 옮겨 적을 문장도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망가진 일상과 정신을 그린  내용이라 어쩌면 무의식에서 위로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더 불행한 사람에게 위로받기도 하는 비열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오후 세시가 넘은 늦은 점심으로는  도서관 휴게실에서 김밥과 컵라면을 먹었다. 날이 날인 만큼 혼자라도 근사하고 비싼 음식으로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찾아 나서기 번거롭고 귀찮았다. 생일날의 점심으로는 턱없이 초라하지만  맛있고 배불렀다. 그러면 됐지 뭐....


  내가 불쌍한가? 불행한가? 인생 잘못 살았는가? 잘못 살고 있는가?  아니다. 다 내가 자초한 거다.

  자칫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일 만도 한데 의외로 나, 괜찮았다.  누군가  내가 생일날을 이렇게 보낸 걸 알면  불행한  여자 실패한 인생이라 동정하겠지만 아무도 모를 거니까  괜찮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사다. 그러고보면 나는 사람보다 책이나 드라마, 영화 따위에서 위로를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것도 괜찮은 방법 아닌가. 


   아홉 시 넘어 도서관을 나왔다. 초겨울 밤은 추웠다. 어깨를 웅크리고 자라목을 하고 종종걸음으로 귀가했다. 남편은 무릎 보호대를 하고 한남정맥 종주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고 무사히 돌아와 있었고 아들은 저녁 먹고 들어간다는 문자만 보내왔다.


   렇게 무탈한 것이 선물이지 뭐...


  그렇게 자위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밝히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 내 생일날을 챙기지 않은 것보다 미리 말해 주지 않은  나를 원망할 것이 뻔했다. 내가 그렇게 길들여 놓은 것이다. 나는 한 때 카톨릭 신자였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하며 가슴을 치는 미사 중의 의식을 나는 평화롭게 받아들였다. 지나친 자책이 아닌가 가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남을 탓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고요했다. 


  나는 올해의 이 쓸쓸한 생일을 요즘 말로 킵, 해 두기로 했다. 내가 뭔가 많이 잘못했을 때 끄집어내서 퉁치자고  참이다.


  이건 정말 즉흥적인 생각인데 꽤 괜찮은 생각 같아서 혼자 조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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