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퉁치자는 건 '마음'인데 남편은 '돈'이더라
날씨도 꿀꿀하고... 그냥 집에 있어....
저번에 만났던 궁평항에서 만나자고? 운전해서? 나 안돼... 나 또 차 망가뜨렸어... 아니... 다른 차랑 부딪친 건 아니고 나 혼자... 또 나 혼자 주차연습 하다가... 남편 또 엄청 화내지 뭐... 도대체 몇 번째냐고... 말로라도 안 다쳤으면 됐다고 해주면 안 되나... 어쩜 그렇게 정 떨어지게 화를 낼까... 매 번... 다른 남편들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 남편처럼 이 정도로 화내지는 않는다던데...
경이 얘기 너도 들었잖아. 불법 유턴하다가 사고를 내서 견적도 오백이 넘게 나왔는데도 남편이 자기가 가끔 불법 유턴하는 걸 보여줘서라고 자기 잘못이라고 오히려 미안해했다잖아. 역시 애처가는 다르다니까.
차량 외부 파손이어서 주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기분이 그래서 운전하기 싫어... 당분간 그럴 것 같아.... 아니 아예 하지 말까 봐...
어쩌다가 그랬냐고?
참...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고 내 행동도 이해가 안 가... 후진주차도 겨우 하면서 전면주차 하려고 하다가... 왜 그랬나 몰라 진짜... 왜 그랬나 몰라... 정말 그 순간에 심술궂은 악마가 잠깐 들어왔던 건지.... 도저히 내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
그날 일요일이었거든... 남편이 점심모임에 늦어서 전철역까지 태워다 줬어. 우리 남편 정말 웃겨. 내가 있는데도 잠자는 애를 깨우는 거야 전철역까지 태워다 달라고. 내 운전이 그렇게나 못 미덥다는 거지. 그래도 면허증 딴 지 일 년이 넘었는데. 그래서 내가 태워다 준다고 했지. 고작 10분 정도 거리도 못 미더워서 갈 때는 자기가 운전하더라. 전철역에 내려서 나 운전석에 앉는 거 보고도 의자 조절해라 사이드미러 조절해라 안절부절못하다가 갔다 글쎄... 집까지 되돌아오는 길이 좀 복잡하기는 해. 4차선이어서 차선변경도 많이 해야 하고 유턴도 해야 하고... 아직도 많이 긴장되는 코스이기는 하지...
무사히 집 앞에 왔는데 욕심이 생기는 거야. 이왕 운전대 잡았으니까 좀 더 돌아다녀보자. 운전 잘하는 방법은 무조건 많이 해보는 거라니까... 운전 안 한 지 일주일도 넘은 것 같고... 자주 해 줘야 두려움도 긴장감도 없어지고 운전 베테랑 친구 말마따나 운전은 그냥 '신발 신고 집 나서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져야 된다니까 뭐니 뭐니 해도 자주 해보는 게 상책이니까....
그래도 새가슴이어서 멀리는 못 가고 집에서 전철역으로 전철역에서 집으로 코스를 다르게 해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지. 하다 보니 또 더 욕심이 나는 거야... 더 멀리 나가 봐?
그래서 또 30분 거리에 있는 한창 운전연습할 때 자주 가던 유원지까지 가 보기로 했지. 일요일 오후라 유원지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붐비더라. 출발할 때는 강기슭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커피라도 한 잔 해야지 했는데 차가 너무 많아서 주차할 자신이 없어졌지. 그래서 그냥 바로 집으로 왔어.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시켰지. 후진주차로. 아직도 한 번에 주차는 안되고 몇 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서 겨우 했지. 특별히 집에 가서 할 일도 없고 주차장이 빈자리도 많길래 연습 삼아 후진주차도 몇 번 했지. 차와 차 사이도 해보고 차와 기둥 사이도 해보고 오른쪽도 해보고 왼쪽도 해보고....
거기서 끝내야 하는데 난데없이 전면주차를 해볼까 싶은 거야. 유튜브 숏폼을 막 올려보다 보면 가끔 주차영상도 나오거든. 요즘 자꾸 전면주차가 눈에 들어와서 눈여겨봤어. 노상주차를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해서 말이야. 영상으로는 쉬워 보이잖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다른 차와 접촉하는 건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한쪽은 기둥이 있고 한쪽에 경차가 있는 곳을 선택했어. 그 경차도 전면주차를 해 놓았더라고. 유튜브 숏폼 영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신중하게 천천히 자동차 머리를 넣었어.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경고음이 울리면서 차가 움직이지가 않는 거야. 기둥과 경차 사이에 대각선으로 끼어 버린 거지. 앞으로 조금만 더 움직이면 경차에 닿을 것 같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려서 바퀴 방향도 보고 생각을 정리해서 천천히 살살 빼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거야. 꼼짝도 안 하니까 후진을 해 놓고 액셀을 그냥 밟아버린 거지. 우지끈....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지하주차장 건물 한 면이 무너지는 것 같이 들렸어...
너도 알다시피 나 운전에 대해서 아니 기계 앞에서는 완전 겁쟁이잖아. 그런데 그땐 왜 그렇게 과감했을까. 내가 한 행동이 분명한데도 내가 한 행동이 아닌 것 같아. 내게 들어온 다른 영혼에게 조절당한 <빙의> 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니까...
제발 조금만 표시 나기를 염원하면서 차 문을 열었지. 그런데 차 문이 잘 열리지가 않는 거야. 조금 힘을 줘서 열었더니.... 맙소사.... 우지지직!!!
마른 나무의 밑동이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 거야...
사실 내가 몇 번 스크래치 낸 것도 있으니까 좀 우그러지거나 스크레치가 났으면 그냥 말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거든. 나중에 발견하고 이거 뭐냐고 그러면 어? 언제 그랬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하면서 능청스럽게 넘어가 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야.... 왼쪽 사이드 미러 앞 범퍼도 찌그러지고...
수리비도 수리비지만 남편 화낼 일 생각하니까 진짜 짐 싸서 집 나가고 싶더라니까... 그래도 요즘 우리 부부 사이 정말 좋으니까 좀 부드럽게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했는데.... 아니었어....
니들은 우리 남편 순하고 착한 인상이라고 그러지? 화났을 때 모습을 안 봐서 그래... 완전 다른 얼굴이야. 얼마나 차갑고 딱딱한지... 온기나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전 냉혈한의 얼굴이야... 좀 과장하자면 지킬박사와 하이디?? 그런 얼굴을 또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온몸이 오그라 드는 거 있지?
집에 들어와서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내 행동을... 오죽하면 좀 쉬었다가 다시 주차장에 가 봤다니까. 찌그러진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문 열 때 나는 그 나무 밑동 부러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만 안 나기를 바라면서.... 차 문을 열어봤지...그럴 수도 있잖아. 상처처럼....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상처처럼... 부러진 뼈도 시간이 지나면 붙는 것처럼...그런 기대를.... 아니 기적을... 그 나무 밑동 쓰러지는 소리가 오작동이었기를... 거짓말처럼 사라져 주기를... 두 번....세 번...
나 바보 같지?
어... 그 정도야... 유난히 자동차에 예민하게 굴어... 나 운전하기 전에는 몰랐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내가 운전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운전이야말로 지금까지 남편이 나를 지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지 뭐. 내가 남편에게 부탁해야 하는 아쉬운 단 한 가지가 운전이었으니까. 솔직히 운전 외에 남편에게 부탁할 일이 없었지.... 나는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편이니까... 뭐 있었나? 생각이 딱히 안나네...
행여 내가 잘못될까 봐 귀해해서 그렇다고?
그건 절대 아닌 것 같고...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걸 못 느낄까... 전혀 아니야...
아 내가 얘기 안 했지? 이번 내 생일 말이야.... 우리 집 두 남자 모르고 그냥 지나갔어. 나도 말 안 했고...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거 같은 생일축하 이번에는 왠지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 혼자 그냥 도서관에서 보냈지 뭐... 별로 슬프지 않았어. 좀 쓸쓸했지 뭐... 그때 생각했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요즘 말로 킵, 해 뒀다가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꺼내놓고 퉁 치지고 해야지... 하하... 이렇게 퉁 칠 일이 빨리 생길지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 생일 지난 거 알아? 몰랐지? 내 생일 그냥 지나간 거랑 이번에 차 망가뜨린 거랑 퉁 쳐....
뭐????
잠깐 어아니벙벙한 듯하더니 화난 표정을 풀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라...
생일선물이랑 차 수리비를 퉁치지고?
뭔가 내 뒤통수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것 같더라...순간적으로 놀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어...내 예상을 완전 빗나간 반응이었거든...
아.... 결국 <돈>이었나? 남편은 결국 <돈>을 생각했구나... 그런데 나는 왜 <돈> 생각을 안 했을까.... 나는 그 <마음>을 생각했는데... <마음>을 퉁치자는 말이었거든.... 내가 차를 망가뜨린 미안함과 남편이 내 생일을 모르고 지나간 미안한 <마음> 말이야.... 나는 그 < 마음>을 퉁치자는 뜻이었는데....
그래.... 참 다르지? 정말 다르지?
정말 달라..... 다름을 인정하는 게 원만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라지? 당연히 부부도 예외는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참.... 씁쓸하더라....
그래.... 조만간 보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