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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Dec 19. 2023

드디어 나의 퇴사를 알렸다.

퇴사한 지 8개월이 지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남편에게 나의 퇴사를 알렸다.  

  퇴사한 지 8개월이나 지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얘기하자면 너무 길고 복잡할 것이고 아무리 솔직하게 얘기한다 해도 남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남편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직장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욱해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고, 진짜로 그만둘 거라고, 기온이 급강하한 지난 금요일 밤 10시 즈음, 사실은 도서관에 있다가 왔지만, 직장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듯 굳은 얼굴로 인상을 쓰고 말했다. 남편은 티브이를 보며 소파에 앉아 있었고 나는 주방 쪽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남편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고 남편은 고개를 돌려야만 나를 볼 수 있는 상태였다. 

  얼굴이 홧홧거리고 가슴이 쿵닥쿵닥 뛰었다. 혈압약을 먹지 않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거짓을 고백하기가 이토록이나 힘든 것인가 싶었다. 사실 이 증상은 이제 그만 말해야지, 이 해가 가기 전에는 말해줘야지 하고 마음 먹은  순간부터 있어 왔다. 8개월을 속여온 것에 대한 반응과 아무 의논도 대책도 없이 맘대로 퇴사한 것에 대한 반응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누가 어떻게 따져보아도 퇴사하는 이유 보다 계속 다녀야 하는 이유가 훨씬 많을 것임으로.


  실업급여는 못 받나?

  특별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로 남편이 물었다.

  못 받지... 자진퇴산데... 그리고 나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잖아....

  남편은 더 이상 말없이 티브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오래 다녔지 뭐....

  나도 티브이에 시선을 둔 채로  낮게 중얼거렸고

  그래... 오래 다녔다....

  남편도 시선을 그대로 티브이에 둔 채 말했다. 티브이에시는 연예인들 여러명이 왁자하게 떠들다가  갑자기 배를 잡고 다같이  숨 넘어갈 듯이 웃어재꼈다.  남편도 나도 띠라 웃지 않았다.  머리가 점점 더 아파왔다.

  아.... 머리가 너무 아프네.... 내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말했고

  그만두면 그만둔 거지 머리가 왜 아파...

  라고 고개를 돌려 나를 잠깐 보더니 금방 다시 시선을 티브이로 돌렸다. 남편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로 왔을 때  나의 시선은 티브이를 향해 있었고 님편이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을 때 나는 티브이를 향한 시선을 남펀에게로 잠깐 옮겼다. 남편의 옆 모습은 어쩐지 굳어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끝내 아무 말도 안 하겠지...


  정년까지 다니지... 일이 힘든 것도 아니고... 할 일도 없으면서... 노후를 위해서라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한 푼이라도 더 벌면 좋잖아....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나도 묻지 않았다. 오래된 부부는 소모적인 다툼이나 신경전을 피하기 위해서 상대가 원할 것 같은  말이나 대답 한이나 행동을 한다고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남편도 나도 지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 가까이나 되서 들어온 아들은 잘했다고 큰 소리로 가볍게 말했다.  엄마가 운전을 잘하면 더 좋을 텐데... 실컷 놀러 다니게.... 그런 말도 덧붙였다.

  아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진심인가 아닌가 따져보고 싶지도 않았다. 예전의 나는 남편이 질릴 만큼 무슨 일이든 끝까지 파고들어 어떻게든 진심을 알아내려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진심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결코 유쾌할것 같지는 않은 진심 따위는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니 당분간이라도 나는 그냥 편하고 싶을 뿐이었다.  오래도록 열심히 일해왔음은 그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니까.

  퇴사를 속인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불편하고 지치고 피곤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머리 아프고 얼굴 홧홧거리고 가슴이 뛰는 증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편안해졌고 우리의 일상은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요일에 남편은 여전히 등산을 갔고 나는 아들과 종일 집에서 뒹굴었다. 식사 외에 토스트도 해먹고 부침개도 부쳐 먹었다.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일요일  늦은 아점으로 남편과 아들이 좋아하는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고 저녁에는 남편과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탄탄면'을 먹고 들어왔다.






  퇴사를 알린 후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영하의 추운 날씨에 아들과 남편이 차례로 출근한 후 나는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마음이 편안한데도 잠은 쉽게 와주지 않아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던 탓이다. 마음이 한없이 풀어졌다.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너나없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악착을 떠는 마당에 다니던 직장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왔으니.

  늦장을 부리다가 겨우 일어나 집안을 환기시키고 요가를 시작했다. 조금 더 난이도가 있는 영상을 선택해서 40분 했다. 요가 후에는 적당히 배가 고팠다. 어제 호박간장비빔국수를 해 먹고 남은 국수에 조금씩 남아 있는 묵은지볶음과 호박볶음반찬을 넣고 프라이팬에 볶듯이 비볐다.  마지막으로 조미김까지 잘라 넣었다. 아주 맛있었다. 다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책을 읽었다.  소설가 오정희 님의 짧은 소설집 '란'을 감탄하면서 읽었다.

  늦은 오후엔 차를 몰고 전철역까지 갔다. 내가 여기저기 망가뜨려 놓은 것을 거금(?) 들여  수리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조심스러웠다. 전철역에서 다시 집까지 와서 지하주차장에서 주차연습을 몇 번 하다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아파트 뒤편 굴다리를 지나서 전철역으로 갔다가 집으로 왔다. 아직 지상 주차장도 텅 비어 있는 시간이었다. 한 바퀴 더 돌까 하다가 차를 지상에 주차시키고 들어왔다. 욕심은 금물이다.  지난번 사고도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조그만 더 조금만 더, 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로써  홈트 요가와 운전(연습), 백수 생활자의 두 개의 루틴이 생겼다.  꾸준히 매일매일 해보자.


남은 반찬으로 대충 만든 비빔볶음국수??

  

  브런치 스토리에 드디어 나의 퇴사를 알린 글을 써서 올리고 싶어서 노트북을 열었다. 열어만 놓고 다시 '활란'을 읽었다. 짧은 소설 한 편을 읽고, 감탄하고, 한빈 읽고 잊어버리기 아까운 문장은 노트에  필사했다, 브런치스토리에 쓸 글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자꾸 하다가 다시 또 짧은 소설 한 편을 읽었다. 글에는 또 감탄하고, 필사하고, 브런치스토리에 나는 어떻게 쓸까 어떻게 써야 하지... 어떻게 시작하지...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포기하고,  다시 짧은 소설  편을  읽었다. (어떤 자원봉사)  (그 가을의 사랑)  (한낮의 산책).... 문장도 좋은데 그  허를  찌르는 반전이라니....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가 유리문에 비친  내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검은 밤이 다가와 있었다.  

  급하게  배추된장국을 후다닥 끓였다. 추운 겨울 늦은 퇴근 후 혹시 뜨끈한 국물을 찾을지도 모를 남편과 아들을 생각해서다.

 그러다 보니 밤 열 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편과 아들이 퇴근해 들어올 시간이 되었다. 노트북은 다시 닫고 책도 정리하고 티브이를 켰다.





 

  출근하려던 남편이 오늘 기온이 급강하하고 눈이 온다니 지상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를 지하 주차장으로 옮겨놓아야 되겠다고 거실 서랍장에 넣어 둔 자동차 키를 챙겨 들었다. 남편은 전철로 출퇴근을 한다.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는데... 이따가 내가 할게... 했더니 못 들은 척 키를 들고나가려 했다. 키가 두 개인데 한 개는 아들이 가지고 다녀서 남편이 키를 가지고 가버리면 나는 오늘 운전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현관까지 따라나가서 한번 더 내가 할게 내가 할 수 있어...라고까지 했는데 못 믿겠다는 듯 그냥 들고나가버렸다. 아무리 내가 몇 번 사고를 냈다곤 해도 너무하네 진짜....지상 주차장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옮겨 놓는 운전까지  기지 못히다니... 좀 지나친 거 아닌가... 밉살스러웠다.

  그러다가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남편은 내가 운전하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아니 운전을 잘하게 되는 걸 경계하는 건 아닐까... 이제 퇴사도 했으니 운전에 능숙해지면 시도 때도 없이 나돌아 다닐 것 같아서?

  생각해 보니 남편이 약간 그런 맘도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남편과 싸우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면 나는 집을 나가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집을 나갔다가도 직장 때문에 돌아와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다. 그래서 남편은 나의 퇴사가 좀 불안한 걸까? 모르겠다.  제 루틴으로 정한   운전하기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다니...


 오늘은 스트레칭 효과와 유연함 뿐만 아니라 근력운동도 되는 한 시간 요가 영상을 선택해서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앉아서 하는 요가였는데 이번에는 서서 하는 요가였다. 진행이 빠르고 동작이 따라 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팔과 다리를 쭉쭉 뻗고 한 발로 서 있어야 하는 자세는 도저히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비틀거리다가 옆에 탁자를 붙잡고서야 겨우 균형이 잡히는 자세가 많았다.   홈트로 요가를 한 지 이주일 지나 처음으로 매트에 땀이 뚝뚝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땀 몇 방울은 작은 성취감과 함께 묘한 희열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얼마 만에 흘려보는 땀방울인지.... 매트에 얼룩진 땀방울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애쓰고 노력한 만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인 깃이다. 그 어떤 작은 결과도 내지 못한 독서와 글쓰기에 지친 요즘의 나이기에 그 몇 방울의 땀방울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요가하는 중에 전화가 한번 왔는데 못 받았다.


  경의 전화였다. 나는 요가를 끝내고 송장자세로 누운 채 생각을 좀 했다. 이젠 경에게도 퇴사를 말해야 되겠지.  8개월 전에 퇴사했다는 말은..... 경에게도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찬가지로 얘기가 길고 복잡해지고 이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4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절친의 자리에  있는 친구인데 8개월을 숨겼으니 어쩌면 남편보다 더 서운힘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더 시간이 흐른 후 떤 뜻밖의  장소에서  옛말 하듯이 고백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결론을 내려놓고 경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고야... 드디어 퇴사했구나... 그렇게 그만둔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 중차대한 일을 갑자기...  

 경의 반응이었다.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그만두고 뭐 하려고... 다닐 수 있는 날까지 다녀야지... 하던 친구였는데 더 다니지 왜 그만뒀냐고 안타까워하지는 않았다.  이젠 너한테 날짜 맞출 필요 없어졌네... 안 그래도 다음 주에 송년회 할까 하는데....라고도 했다. 말하는 톤이나 목소리에서 나의 퇴사를 은근히 반기는 듯 느껴졌지만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 외에 살이 자꾸 쪄서 큰일 났다는 얘기, 몇 년 전에 요가하다가 근육이 파열돼서 못하게 됐다는 얘기, 그리고 차 키를 들고 가버린 남편 흉과 애들 얘기를 오래 하다가 끊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오늘도 냉장고를 뒤져 떡만두배춧국을 끓여 먹었다. 커피를 마시고 또 책을 읽었다. 오정희 님의 짧은 소설집 '란'을 마저 다 읽었다.

  

 너 그만뒀다며? 야.... 대단하다.... 정년까지 다닐 줄 알았더니... 심심하지 않아?

  그 사이 경과 통화를 한 희도 전화를 해왔다. 이제 자주 좀 보자...라고도 했다.

  심심하지 않아 아직.... 그래 그래....라고 내가 말했다,  내일은 동네 동창 모임이 있고 다음 주에는 두 개의 송년 모임이 있다. 갈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가기로 했다.  그러면 한 해가 다 가고 말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백수생활의 시작이다.


  요가 운전 독서 글쓰기 가끔 모임 가끔 등산 가끔 여행....

  

  또 무엇이 있을까....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게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그냥 이렇게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젊은것도 아닌데... 그 어떤 성취를 꼭 이루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백수의 내 머리는 자주 복잡하고 가끔 애써서 단순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사람의 변모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바위가 닳아지듯 안개비에 모르는 새 옷이 젖듯  어느날 문득 섬뜩한 자각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성장과 늙음이 그러하듯, 잠복기가 긴 만성적인 질환이 그러하듯. ㅡ오정희 짧은소설집 , 활란 (떠있는 방)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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