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을 감춘 나의 퇴사를 알린 후 일주일쯤이 지났다.
"엄마 진짜 퇴사했네.... 이제 진짜 회사 안 나가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흘려들은 그 말이 그날의 불면의 밤 내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니까 아들에게 나는 늘 직장에 다니는 엄마였다. 주말과 공휴일에도 거의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엄마였다. 늘 서두르고 바빴다. 특히 고객 관리자 동료 등 많은 사람들을 싱대해야 하는 내게 맞지 않는 직장에 다니느라 더욱 피곤하고 불만 가득한 엄마였던 것이다.
임신과 함께 전업주부였다가 아이엠에프 때 남편이 직장을 잃고부터 다시 직장생활을 했으니 아들이 다섯 살 무렵부터였다.
아들이 어릴 때 가까운 곳에 둘째 오빠가 살았었다. 유치원 다닐 때는 종일반이 끝난 후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엔 방과 후 한 두 개의 학원을 끝낸 후 아들은 둘째 오빠네 집에 갔다. 아들이 유치원 2년과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나는 경기도의 신도시에서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야근이 잦은 출판사에 다녔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당시의 사장은 야근을 많이 시켰다.
당시 둘째 오빠의 집은 아파트 1층이었고 14평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로로 긴 주방을 지나 티브이와 장롱이 놓인 거실 겸 안방이 바로 보였다. 좁은 집이기 때문에 주방과 안방 사이 문은 항상 반쯤은 열려 있었다.
야근까지 하고 퇴근한 늦은 밤 오빠집의 현관을 들어서면 티브이만 켜진 어둑 어둑한 집안의 티브이 앞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린 아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오빠네 식구들은 모두 누워 있거나 잠들어 있는데 내 어린 아들만 티브이 불빛 앞에 덩그렇게 혼자 앉아 있었다. 누워서 자라 해도, 잠들어도 엄마 오면 깨워 주겠다 해도 내 어린 아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했다. 오빠네 집에서 눕지도 잠들지도 않고 그렇게 앉아 나를 기다리던 어린 아들의 그 모습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내 눈시울을 붉어지며 목을 메이게 한다.
내가 현관에 들어서면 아들은 티브이 잎에서 천천히 일어나 나를 향해 걸이 나왔다. 기다림에 지친 듯 엄마... 하고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다가와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낮게 앉아있는 나의 품에 폭 안겼다. 울 듯 말 듯 했지만 결코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아들은 일찍 철이 들었던 것일까. 아들은 한 번도 이이답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막무가내로 떼를 쓰지 않았다. 갖고 싶은 장난감 앞에서도 안돼,라고 하면 입을 삐죽이면서 금방 포기했다. 아들은 내가 감정적으로 불안하고 미숙한 엄마라는 걸 무의식 중에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언젠가 남편이 아들만 데리고 친구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큰 마트에 갔다가 잠깐 아들을 놓쳤단다. 남편 친구가 혼자 떨어져 헤매는 아들을 찾았는데 그 어린아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도 소리 없이 눈물만 투닥투닥 흘리더란다. 남편 친구는 그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기특하면서 애잔해 보였다고 나에게도 몇 번 얘기했었다. 또래의 자기 아들 같았으면 소리 내서 왕왕 울었을 텐데 어떻게 그 어린애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릴 수 있느냐고...
그렇더라도 나는 계속 직장에 다녔다. 아니 다녀야 했다. 서울의 출판사와 잡지사에 다니다가 집에서 가깝고 근무시간도 탄력적이어서 가정과 병행하기 좋은 조건인 백화점에 파트타임 케셔로 이직했다. 주말과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 부모의 경제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친가도 외가도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도움은커녕 친가 쪽은 우리의 경제적 도움이 일찌감치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나는 직장에 다녀야 했다. 적성 따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의 경제적 무능이 자식들의 큰 짐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내 아들에게는 그런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힘들어 부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부모이고 싶었다. 아니 도움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부담이 되는 부모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오랜 직장생활을 견디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송년 모임 두 번을 제외하고 12월 내도록 나는 거의 집에 있었다. 남편이나 아들이 퇴근해 집에 들어서면 항상 내가 있었다.
어서 와... 춥지? 수고 많았어.,. 저녁은?
그렇게 맞아 주었다. 이런 날들이 처음인 듯 며칠은 어색했다.
출퇴근 시간이 긴 것도 있지만 거의 늘 자정 가까이 되어서 들어오던 아들이 자주 9시나 10시에 귀가했다. 신발을 벗으면서 엄마 배고파... 했다. 나는 급히 저녁상을 차렸고 뜨거운 국이나 찌개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 아들 앞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말에도 셋 다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점심 같은 아침을 먹고 거실에 셋이서 앉거나 누워 티브이를 보며 같이 웃기도 했다. 별거 아닌 평범한 이런 시간을 우리가 얼마나 갖지 않고 살았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이런 시간들을 놓치고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어느 주말에는 셋이서 풍천장어집에 가서 간단하게 우리끼리 송년 모임을 가졌고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베이커리카페에 가서 조각케이크와 커피를 마셨다. 눈이 내렸다가 비가 내렸고 그 눈과 비가 섞여 얼어가는 밤이었다. 내년에 아들이 독립해 나가면 나는 완전 자유인이 된다고, 엄마에게도 자주 내려갈 것이며 제주도 한달살이도 할 것이며 후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것이므로 등산도 자주 다닐 것이라고 주로 나의 포부를 들떠서 떠들어댔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실현 가능한 계획일 수도 있고 말만으로 끝날 수도 있는 계획들이다. 나는 꼭 할 거야, 하고야 말 꺼야, 하는 야무진 실천 의지는 없다. 버킷 리스트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뭐 괜찮다. 꿈이 꿈으로만 끝나도 그다지 비관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내게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그날의 내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 잘 살아내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쿠팡에 아르바이트를 다닐 지도 모르겠다.
8시 무렵 등산 갔다가 돌아오던 남편과 집 앞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이미 하산 후 일차 소주 이차 맥주를 마신 남편은 알콜 기운에 표정이 적당히 풀려 있었다.
"퇴사한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 말을 못했는데..."
차가운 맥주를 먹태 안주와 함께 반쯤 마셨을 때 남편이 느린 저음으로 어색하게 말했다.
"수고 많았다 그동안..."
다정한 마음의 표현에 무척이나 인색한 남편의 성격상 이 정도의 말 한 마디도 알콜의 힘을 빌리고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짐작되었다.
나는 꼭 프러포즈라도 빋은 듯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재빨리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우리는 짐깐 눈을 맞추고 마치 처음인듯 정답고 따스한 미소를 나누었다.
나는 안다. 이 미소가, 따뜻한 마음이, 다정한 말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지금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다가올 내일을 불안스럽게 걱정하며 오늘 이 순간을 망치지는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