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이미 어둡고 하늘은 아직 푸르도다

by 찌니

2024년 1월 1일 새벽 6시. 일어나자마자 양치를 하고 눈꼽을 떼고 모자를 덮어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집을 나섰다. 그 와중에 보온병에 커피와 귤 몇 개는 챙겼다. 올해는 귤이 참 맛있다. 한두 번쯤은 '귤 잘 못 샀네 잘못 샀어' 할 때도 있었는데 이번 겨울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임 중에 귤을 까먹던 친구가 '올해는 귤이 참 맛있는 거 같아' 하고 말했었다. 그런 겨울이 있기도 하나 보다. 귤이 맛있는 겨울....

목적지는 여주 신륵사 강월헌. 남편이 급하게 찾아낸 가까운 일출명소였다. 일출시간은 7시 40분경. 시간은 넉넉했고 어둑어둑한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입구 영업소를 통과하였습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고속도로 입구를 통과하면 들리는 이 멘트. 이 멘트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쩐지 설레고 가슴이 뛴다. 마치 어린 시절 체육대회나 운동회 때 달리기의 시작을 알리는 '요이~~~~~ 땅!'과 같은 신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입구 영업소를 출발한 차들이 '요이 땅' 신호를 받은 선수들처럼, 저수지의 수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쏟아지는 물처럼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엔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있는 가로등마저 우리들의 출발을 응원하는 박수라도 치는 듯 마음이 들뜬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는 순간의 들뜸일 뿐이지만.

여주가 가까워올수록 창밖으로 출발지에서는 보이지 않던 쌓인 눈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남한강에서 피워 올리는 물안개였다.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행렬... 양쪽 인도로 두껍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광경이다. 대부분 모자를 쓰고 두껍고 긴 잠바를 입고 손은 주머니에 넣고 앞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마치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자들의 행렬 같이 엄숙해 보이기도 했다.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겨우 주차를 하고 보니 일출시간이 가까웠다. 이미 강이 내려다 보이는 정자와 긴 언덕에는 사람들이 두 겹 세 겹으로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강과 하늘은 안개가 자욱하여 어디까지가 강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해 뜨기 전 하늘 가득 퍼지는 붉은 기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출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어서였는지 사람들은 일출시간이 지났음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눈에 덮혀 반쯤 얼어붙은 비탈진 언덕을 만류하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뒤뚱거리며 강물 가장 가까이로 내려갔다. 강가의 물은 얇은 살얼음 아래 고요했고 먼 곳의 강물은 두꺼운 얼음 속에서 더욱 고요했다. 그 고요한 물안개 속에서 가끔 물새소리가 들려왔다. 물오리도 있고 천둥오리도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물의 표면을 홀로 우아하게 나는 새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강의 안갯속에서 몇 십 마리의 새떼가 펼쳐진 브이자의 대열을 만들어 날아올랐다가 내 머리 위의 뿌연 하늘을 지나 건너편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라진 새들의 여운이 아쉬울 즈음 또다시 저 먼 강의 안갯속에서 다시 새떼들이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좀 삐뚤어진 일자의 대열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내 머리 위의 뿌연 하늘을 지나 반대편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고 나는 다시 날아오를 새떼를 기다렸다. 새들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반복해서 날아올랐다. 나는 지겨운 줄 모르고 계속해서 새떼들의 비상을 기다리고 고개를 꺾고 올려다보고 아쉽게 이별했다. 강가로 내려오지 않고 위쪽에 있던 남편의 그만 올라오라는 전화를 받고도 몇 번 더 새들의 비상을 구경한 후 올라왔다.

강가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와 삼층석탑과 650년 된 은행나무와 천년고찰의 경내를 구경하다가 절에서 제공하는 따뜻한 떡국도 먹었다. 10시가 가까운데도 안개는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지독한 안개였다. 장엄한 붉은 일출도 굽이 굽이 흐르는 남한강의 물줄기도 끝내 볼 수 없었지만 그리 아쉽지만은 않았다.





친구 경은 오랜만에 손글씨로 쓴 엽서를 책 두 권(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 피에르 르메트르 장편소설 사흘 그리고 한 인생)과 함께 같이 줬다. 지난 12월 28일 송년회 겸 나의 늦은 생일축하 자리에서였다. 술기운이 약간 돌 즈음에 책을 주면서 책 속의 엽서를 꺼내서 자기가 쓴 글을 낭독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돌출 행동이었다. 술기운이 도는 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우렁찼다. 가끔 삑사리를 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 씩씩하고 우렁차게 읽었다.


..... 늦은 생일 축하하고 그보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해방된 너의 새로운 시간들을 응원해...

요즘 프로스트의 '읽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를 읽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시구를 너에게 보내...

'슢은 이미 어둡고 하늘은 아직 푸르도다...'

'이미'에 절망하기보다 '아직'에 무게를 두고 살자 우리...


특히 나에게 보낸다는, '숲은 이미 어둡고 하늘은 아직 푸르도다' 라는 문장은 몇번이고 반복 낭독했다. 낭독 후에는 요란한 박수와 함께 다 함께 잔을 들어 나를 위한 건배를 했고 그날 밤의 모임은 자정을 훨씬 넘겼다. 나는 술을 많이 마셔서 좀 취했고, 남편이 데리러 왔었다.


친구가 준 그 엽서는 나의 2024년 다이얼리 맨 앞장에 끼워져 있다. 나는 다이얼리를 펼칠 때마다 먼저 그 엽서를 읽는다.


그리고


숲은 이미 어둡고 하늘은 아직 푸르도다


라는 문장은 늘 소리내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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