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아들이 핸드폰라이트를 켜고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뭐 찾느냐고 물었더니 코로나 자가 진단기를 찾는다고 했다. 간간히 기침을 하며 목을 움켜잡기도 했다. 다행히 자가진단기 한 개가 서랍 깊숙이에서 발견되었다. 새벽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잠들었다가 두통과 기침과 목구멍의 통증을 참을 수 없어 깨어났다고 했다. 금요일 오후 무렵부터 몸살기가 있어서 약을 사 먹었다고도 했다. 웬만하면 약 먹고 나았는데 낫기는커녕 더 아프다고 했다.
결과를 기다리며 아들은 코로나에 걸리기를 바랐다. 그러면 회사에 공식적으로 며칠 쉴 수 있다고.
회사 일이 힘들어? 물었더니
"힘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
라고 안경을 벗은 미간에 인상을 푹 쓰고 대답했다. 서른 살 아들, 키 186cm에 몸무게 80이지만 아직도 얼굴에 여드름이 나는 아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어려 보였다.
코로나에 걸리기를 내심 바랐던 아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여기저기를 뒤져서 나온 쌍화탕을 데워서 먹이고 두통약을 먹이고 따뜻한 보리차를 보온병에 담아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그리곤 열이 나서 뜨거운 이마와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다가 괜찮다고 뿌리치는 아들의 짜증을 듣고서야 물러났다.
아침 일찍 아들은 병원에 갔다 온다고 집을 나섰다. 데려다줄까? 같이 가줄까? 물었다가 됐다는 짜증 섞인 대답을 들었다. 아들은 늘 아직도 자기를 어린 아들 취급하는 나를 가끔 못마땅해했다. 못마땅해해도 별 수 없다 나는.
아들이 병원에 간 사이 나는 지난달 엄마 생신에 갔다가 가져와 냉동실에 얼려 놓은, 아들이 무척이나 잘 먹는 우리 엄마 시골 가마솥표 곰국을 꺼내 해동시켰다.
아들은 두툼한 약봉지와 본죽을 사들고 들어왔다. 죽을 반 정도 먹고 약을 먹고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나는 빨래를 하고 집을 대충 치우고 곰국과 같이 먹을 김장김치와 파김치를 다시 꺼냈다. 틈틈이 아들 방에 들어가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내리면서 축축하게 땀이 났다.
아들은 하루를 꼬박 앓고 다음날 오후에 거의 나은 것 같다고 바람 쐬러 나갔다가 들어왔으며 월요일에 평소처럼 출근했다.
나는 카페 구석의 2인용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비어 있는 4인용 옆 테이블에 사람들이 우르르 와서 앉았다. 얼핏 보아 부모와 20대의 딸 아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4인 가족이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는 몸을 옆으로 해서 지나가야 할 정도로 가까워서 그리 큰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는데도 대충 대화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들렸다. 흥미 있게 읽고 있는 책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탱크(김희재 장편소설)'의 내용에 그들의 대화가 섞여 들었다.
대화는 주로 엄마와 아들이 하고 가끔 아빠가 끼어드는데 이상하게도 딸로 생각되는 여자애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주로 딸들이 말을 많이 하는 거 아니었나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벽 쪽으로 길게 붙은 소파의자 앞에 세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는 형태라 나의 바로 옆에 여자애가 앉아 있고 여자애 옆에 남자애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은 떨어져 있지만 의자는 붙어 있는 형태였다. 내가 가끔 책에서 시선을 돌려 조심스럽게 티 나지 않게 그들을 살펴도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 있는 부모만 보일 뿐 내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남자애와 여자애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고개를 휙 돌려 타인의 얼굴을 볼 정도의 무례함이 나에게는 없으니.
얼굴이 작고 수수하고 단정한 40대로 보이는 부모는 어쩐지 좀 깐깐해 보이기도 했다.
주말밤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카페 안은 점점 더 북적거렸다.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사람들로 한 시간 전쯤 내가 들어설 때는 비어 있던 테이블이 어느 사이 거의 꽉 차 있었다. 그들이 각자 쏟아내는 말소리로 천장이 높은 커피숍은 넓은 강당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떠드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옆 테이블의 대화 내용도 그 웅웅 거림 속에 파묻혀 점점 많은 부분 잘 들리지 않았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애가 어린 시절 자신이 티브이로 영어 공부할 때의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것 같았고 사이사이 아빠 목소리가 끼어들었고 엄마의 목소리는 더 자주 길게 들려왔다. 딸애가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인가 보다 생각되었다. 반면 남자애는 말이 많고 가벼워 보였다. 카페 안이 시끄러워도 그다지 책 읽기에 방해받지 않았는데 그날은 그 4인 가족이 옆에 와 앉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 의식 깊은 곳에 4인 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내재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가 너무 가까웠으며 평소 내가 선호하던 자리가 아니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대화마저 엿들을 수 없게 되고 책 읽기도 틀린 것 같아서 화장실에 갔다 와서 집에 가기로 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면서 옆 테이블의 여자애를 얼핏 보았다. 바로 앞 엄마되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었다. 아주 순간이지만 부모 앞의 딸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은 카페 외부에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카페로 들어와 구석진 내 자리로 걸어 들어갈 때에야 나는 남자애와 여자애의 얼굴을 비스듬하나마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둘 다 20대에 막 들어선 듯 앳되 보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나는 보았다. 테이블 밑에서 남자애가 여자애의 한 손을 꽉 잡고 있는 것을.
아하... 여자 친구이었구나....
남매가 아니었어... 아들 딸이 아니었어...
아들의 여자친구였어... 남자친구 부모님과의 첫 대면인가 보구나....
큰 의문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제야 나는 어떤 미진한 매듭이 풀린 듯 개운했다. 남자애는 테이블 위에서 태연한 얼굴로 부모와 끊임없이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테이블 밑에서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자애는 좀 긴장한 듯 남자친구 엄마의 얘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남자애는 행여 긴장하고 불편해할 것 같은 여자친구의 마음을 다독여 주듯이 그렇게 계속 여자애의 한 손을 자기의 손안에 꽉 움켜 잡고 있다가 가끔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작은 손을 꼬물꼬물 만지작거렸다..
만지작만지작.... 긴장하지 마...
만지작만지작.... 나 여기 있어...
만지작만지작.... 사랑해....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짐을 천천히 챙겼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옆의 테이블 밑에서 꽉 잡은 어린 두 손이 서로를 만지작거리면서 속삭이는 대화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때가 되면 부모를 배신하는 존재들이다. 그 배신이 시작되었음을, 보이지 않는 테이블 밑에서 여자애의 손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남자애의 부모는 알고 있을까.
내 아들,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미안한 내 아들도 나 모르는 어딘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