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차갑고 따스한

by 찌니



...........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몸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하는 고로, 이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은 모든 면에서 편안하다고,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래왔다고 우쭐댄다면 그는 더 이상 편안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불속에 있는 퀴퀘그와 나처럼 코끝이나 정수리가 살짝 시리다면, 그럴 때야말로 전반적인 의식 속에 가장 기분 좋으면서도 확실한 온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침실에는 절대 난로를 들여서는 안 된다. 난로란 부자들이 편안함을 방해하기 위해 사들이는 멍청한 사치품 중 하나다. 이런 종류의 감미로움을 만끽하려면 자신과 자신의 아늑함 그리고 차가운 바깥공기 사이에 담요 한 장 말고는 그 무엇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북극의 수정 같은 얼음 한가운데에서도 한 점 따스한 불꽃처럼 누워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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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한 밤중이나 새벽에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면 덮고 자던 이불을 둘둘 말고 거실에 나와 눕기 시작한 때가.

딱 꼬집어 언제부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몸의 온도가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갱년기가 시작될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어컨에 꼭 의지해야만 하는 한여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날 나는 거실에 누워 베란다와 이어진 통창을 열어놓고 거기서 들어오는 찬 바깥공기를 얼굴에 느끼고 코로 호흡하며 다시 잠들었다. 한겨울에도 베란다의 문은 항상 조금은 열어 두었다. 비가 들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폐쇄공포증의 일종인지 몰라도 나는 사방이 완전히 닫힌 걸 싫어한다. 차를 타서도 마찬가지다. 어디든 조금은 열려 있어야 한다. 숨구멍처럼.

그래서 거실의 통창을 열면 항상 베란다 문을 통해 들어온 바깥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다시 잠들기도 했고 오래 뒤척이기도 했지만 뒤척여도 조바심이 나거나 짜증이 나는 뒤척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면서 뒤척일 수 있었다. 특히 꽃이 피는 봄날이나 비나 눈이 오는 날이나 바람이 유난히 부드러운 날의 잠에서 슬쩍 깨어 비몽사몽 맞이하는 새벽 공기는 꿈길에서 만난 연인의 손길이나 숨결처럼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물론 얼굴 외에 다른 몸은 이불에 감싸여 있었다. 몸은 따스하고 얼굴은 차가운, 그런 상태를 나는 언제부터 즐겼는지는 알 수 없다. 잠들었다가 다시 침실로 살그머니 들어가는 날도 있고 그 상태로 아침까지 자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날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열어놓은 문은 도로 닫혀 있기 일쑤였다. 가족이 보기엔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잠자리인 것이다.


어젯밤 늦게부터 비바람이 불었다. 나는 영락없이 새벽녘에 잠이 깨어 거실로 나왔고 거실의 문을 한 뺨쯤 열어놓고 다시 누웠다. 비바람이 심했으므로 그 정도만 열었어도 얼굴에 와닿는 공기가 더없이 상쾌했다. 이불은 꼭 꼭 여미면서 목은 길게 빼서 그 찬 공기를 호흡했다. 그렇게 누워 의식과 무의식, 잠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중에 요즘 읽고 있는 모비딕의 저 문장이 먼바다 돛단배처럼 흔들리며 다가왔고 그 뒤를 이어 또 하나의 돛단배가 흔들리며 따라왔는데 그것은 먼 과거,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고향의 시골집 한 귀퉁이에 엉성하기 그지없었던 최초의 나의 방 나만의 공간이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다섯 형제가 살던 우리 집엔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안방과 사랑방 두 개였다. 다행히 방은 두 개 다 직사각형으로 중간에 문을 달아 두 개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길었다. 안방에서는 엄마 아버지와 동생이 아랫목에 자고 언니와 내가 윗목에서 잤다. 사랑방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랫목에 주무시고 오빠 둘이 윗목에서 잤다. 한겨울의 아랫목은 노란 장판이 누렇게 변하도록 뜨거웠다. 윗목까지 온기가 가게 하기 위해서 불을 많이 때기 때문이었다. 그 온기가 식어갈 새벽 무렵에는 자다가 말고 아랫목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인지 추위를 참아가면서 잠을 잤던 기억은 없다.


첫째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고 언니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집에 방 하나를 만들었다. 변소와 외양간과 농기구와 곡식의 창고가 있는 아랫채에 붙여서 대충 만든 작고 엉성한 방이었지만 대가족을 거느린 가난한 농군이셨던 당시의 아버지로서는 최선을 다하셨으리라.

밤마다 천장에서 쥐들이 뛰어다니고 작은 창문과 방문 틈으로 바람이 제 세상처럼 들고나던 그 방의 맨 처음 주인은 언니와 나였다. 고등학생이던 언니와 중학생이던 나는 그 방에서 밤늦도록 무슨 얘긴가로 웃고 떠들었다. 천장의 쥐들을 겁주려고 끊임없이 야옹야옹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도 키득거렸고 뱃살을 빼겠다고 이불 위에 누워서 두 다리를 45도로 들어 올리고 누가 오래 있나 내기를 하면서도 키득거렸다. 가끔 언니의 친구들이 놀러 와 자고 가는 날이면 괜히 내 방을 빼앗긴 것 같이 심술이 나서 밤늦도록 안방을 들락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가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방은 당연히 나의 차지가 될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방을 쓰던 고등학생 둘째 오빠가 자기가 쓰겠다고 나섰다. 나는 내가 따로 방을 꼭 써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생리였다. 나는 생리를 하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방을 쓰기 불편하다고. 아무래도 남자인 오빠보다는 여자인 내가 방을 따로 써야 되지 않겠느냐고, 둘째 오빠에게 말은 못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의 그 이유는 둘째 오빠를 포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는 결국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방의 윗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랑방엔 아버지가 큰맘 먹고 주문 제작한 커다란 목재 책상이 있었다. 나는 내 방을 내어주는 대신 그 커다란 목재 책상의 주인이 되었다. 그 책상은 앞마당과 사랑방의 아랫목을 등지고 놓여 있었다. 정면의 창을 통해서 뒤뜰과 뒷산이 보였다. 그 책상에 앉아 있으면 온통 불만 투성이인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부분 그 책상에 등을 보이고 앉아서 예민한 사춘기를 보냈다. 몸은 거기 붙밖이처럼 앉아 있어도 마음은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너고 더 먼 우주공간까지 날아다녔다. 학교에서 조사하는 취미란에 공상하기, 를 써넣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사이가 아주 좋으시고 조용하신 분들이셨다. 내가 책상에 앉아 있으면 무조건 공부하는 줄 알고 더욱 조용조용하셨다. 그렇더라도 지금 생각하면 아주 불편했을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그리 불편했었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당시의 농촌의 지극히 흔하고 평범한 가정환경이었다.

둘째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난 후에야 그 방은 드디어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당연히 언니처럼 동생과 같이 방을 써야 했지만 나는 나 혼자 그 방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방을 갖고 싶었다. 막내인 여동생은 특히 엄마 아버지 곁을 좋아해서 그리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잠깐 나는 못된 언니라는 낙인이 찍혔다.

당시 학교에서는 가정환경 조사라는 걸 했는데 그 항목 중에 자기의 방이 따로 있는지 없는지도 있었다

그 가정환경조사에서 동생은 자기의 방이 없다고 대답했고 나는 내 방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동생의 담임이 네 언니는 방이 있다는데 같이 안 쓰냐고 물었고 내 동생은 이때다 싶었는지 언니가 그 방을 혼자 쓰고 있다고 대답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동생과 방을 같이 안 쓰는, 동생을 쫓아낸 못된 언니로 소문이 났었다. 면 소재지의 작은 학교여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웬만한 가정환경은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우리 집 가까이에 도시에서 부임해 온 선생님들 여럿이서 같이 생활하는 하숙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학기 내도록 오고 가다가 만나는 선생님들 마다 한동안 이 못된 언니... 하면서 내 머리에 알밤을 먹이기도 했다.


그 방에서 2년을 나는 거의 하숙생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부모님에게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자라는 둘째딸이었다. 잔병치레가 잦아 손이 많이 가는 보기만 해도 애틋한 막내동생 뒤에서 나는 조금은 외롭고 아주 자유로웠다.

책가방을 이불속에 파묻어 놓고 학교에 간다고 나와서 버스를 타고 이웃 시에 가서 돌아다니다가 귀가하기도 했고 잠깐은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가출모의도 했었다. 다섯 명 중 두 명은 진짜 가출을 했고 세 명은 마지막에 주저앉았다. 가출 모의의 그 비밀스러움과 반항과 일탈의 꿈을 즐겼을 뿐 가장 중요한 용기, 앞에서 무릎을 꿇은, 주저앉은 세 명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밤새도록 백열등 불을 켜 놓고 책을 읽고 시를 외웠고 꿈을 꾸었다. 특히 당시 유명하던 소설가 한수산 박범신 님의 소설들을 읽으며 앞으로 다가올 사랑의 모든 형태를 공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여름에는 모기가 많아서 모기향을 자욱하게 피워 놓아야 했고 겨울에는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다. 워낙 허술하게 대충 지은 방이라 비가 많이 오면 아궁이에 물이 찼다. 그러면 물이 찬 아궁이 너머 방구들이 보이는 깊숙한 곳에 장작을 던져 넣어야 했다. 장작에 불이 붙기까지는 끊임없이 마른 덤불과 나뭇가지와 종이를 쑤셔가며 바람을 불어넣어야 했다. 엉덩이는 높이 쳐들고 머리는 거의 아궁이에 처박은 상태로 매운 연기를 마셔가며 눈물 콧물 흘려가며 군불을 땠다. 그건 아주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누가 시켰다면 아마도 하기 싫다고 반항했을 일이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그냥 안방이나 사랑방에서 자면 된다고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기어코 그 방에서 잤다. 그렇게 힘들게 불을 때면 그래도 방바닥은 금방 설설 끓듯이 뜨거웠다. 그러면 나는 솜이불을 두껍게 깔고 덮고 그 위에 누웠다. 마른 장작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몸은 녹아내릴 듯 따뜻하고 얼굴은 눈이 내려앉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 길고도 짧은 한겨울의 밤들은 태어나기 위해 꿈틀대고 꼼지락거리고 때론 몸부림도 쳤던 알 속의 시간이었다.


아직도 어둠은 물러나지 않았는데 출근준비를 하는 아들의 기척에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아슴아슴 다시 잠들 때의 얼굴에 닿았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벌써 문을 닫아 놓은 것이다. 나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이불 밖으로 한쪽 팔만 꺼내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하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덮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이불을 다시 여몄지만 얼굴은 그대로 방치했다. 올해의 첫 영하의 날씨라고 했다. 금방 두 뺨이 얼얼해지고 코끝이 간지러우면서 재채기가 나오려 했다. 그러나 나는

북극의 수정 같은 얼음 한가운데에서 한 점 따스한 불꽃처럼 누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조금만 더 느끼며 누워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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