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인생 첫 태클

담낭에도 간에도 췌장에도

by 찌니


10월 18일 수요일 오전 9시 15분 61세 남편은 생애 처음으로 엠알아이 검사실에 들어갔다.


지난 월요일 내과의 진단과 약처방을 받은 후 이틀 동안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루 정도 식욕이 없었는데 화요일 오후부터 식욕도 제대로 돌아왔다고 했다. 의사가 알려준 대로 식전 약과 식후 약을 잘 챙겨 먹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챙겨 먹는 거 귀찮다고 보약 같은 거도 마다하던 남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겁이 났나 보다. 컨디션도 식욕도 돌아왔다고는 해도 살이 많이 빠져서 얼굴의 주름 골이 깊어졌다.


일단 술을 삼가해야 하니 당연히 귀가시간이 빨라질 것인데 이건 나로서는 좀 곤란하게 되었다. 남편은 내가 퇴사한 줄 모르고 있다. 아직도 나는 들키지 않았다는 얘기다. 문제는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서 같이 들어가려고 전화를 하는 거였다. 술 한잔하고 들어간다, 갑자기 회식을 하게 됐다, 가까운데 사는 친구가 잠깐 보잔다 등 핑계를 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나 통하지 매번 그랬다가는 어떤 눈치를 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일단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생각하고 있다. 안 들키면 좋겠지만 들켜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검사 결과는 오후 세시 이후에나 나온다고 했다. 둘 다 배가 고파서 근처 식당에 가서 순댓국을 먹고 일단 집으로 다시 왔다. 남편은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하고 나는 미뤄 두었던 옷 정리를 했다. 여름옷은 깊숙이에 넣고 가을 겨울 옷들을 바깥쪽에 두고 몇 년 동안 굴러다니기만 하던 옷 몇 개는 버리기로 했다. 버릴까 말까 애매한 옷은 과감히 버렸다.


두상이 둥글고 팔다리가 긴 젊은 내과의는 신중하게 모니터를 보면서 설명을 해줬다.

담낭에는 담석이 있고 간에도 염증이 보인다. 췌장에도 염증이 있는데 췌장 쪽 염증은 암을 유발하는 염증과 암이 아닌 염증(전문 용어로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 있는데 다행히도 남편에게서 발견된 염증은 암은 아니다. 담낭의 담석도 간의 염증도 췌장의 염증도 초기 단계여서 6개월에 한 번씩은 엠알아이를 찍어보기를 권하며 술과 가공식품 탄 음식 등은 먹지 말아야 하며.... 담석은 작지만 수술로 떼어내고 싶으면 떼어내도 괜찮고.... 수술하지 않고 처방해 주는 약 잘 먹으면서 식생활 신경 쓰면서 관리 잘하면 회복될 수도 있고...... 더 자세한 걸 원하시면 대학병원에 한번 가보시라... 거기엔 엠알아이보다 더 선명하게 찍는 의료기기(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가 있다...


결국은 본인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호전된 상태로 봐서도 그렇고 하여 일단 6개월에 한 번씩 엠알아이 검사를 하기로 하고 약 처방을 받았다. 처방받은 약의 양이 말 그대로 '한 보따리'였다.

이제 더 이상 방만하게 살지 말라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태클이 들어온 거다.

병원을 가까이해야 하고 어디에 가든 약보따리를 챙겨야 하는... 이제 이런 나이가 되었다고 말이다.


돌아오는 길의 포도 위엔 어느새 많은 낙엽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제 어디를 둘러보아도 울긋불긋한 가을빛이 완연하다. 오색찬란한 이 시기는 아쉬움을 남긴 채 금방 지나갈 것이다.


계절도 가을이고 인생도 가을이다.

계절은 가을 겨울 보내면 봄이 또 오지만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가을과 겨울만 남았다는 거다. 이 인생의 가을을 잘 보내야 다가올 인생의 겨울이 평온할 터이다.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거두어들일 것은 거두워 들이되 너무 욕심 내지 않기를...

그리하여 인생의 겨울이 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겨울나무처럼 가볍고 단단하고 꼿꼿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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