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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Aug 03.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열무 뽑다가 노래방 갔다 123

열무 뽑다가 노래방 갔다   



         

얼마 전이었다. 나는 마당에서 지붕 위 고양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길 씨가 밭에서 열무를 뽑다 말고 말했다.

“시내로 밥 먹으러 가요?”

“왜요?”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친구들과 가세요!”

“친구들과 가면 견적이 엄청 나와서 안 돼요.”

“그럼 가야지요.”

성길씨는 열무를 소금에 절여놓고 밭에서 입은 옷차림대로 나왔다. 나는 빈손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호박차, 멸치볶음, 마카롱, 홍삼차를 그의 집 문안에 넣어 놓고 따라나섰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하남 신장동으로 갔다. 가는 곳마다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하는 사람들로 꽉 찼다. 몇 군데를 돌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데로 가요!” 성길씨는 그새를 못 참았다.

“그냥 여기서 기다려요!” 나는 욱 열이 올랐다.

성길씨는 꼼짝 않고 서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쉽게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식당을 내가 이 층을 몇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왔다. 할머니가 힘들까 봐 그랬는데 잠깐도 못 기다리는 성길씨에게 짜증 났다. ‘번갯불에 멸치를 볶자는 거여, 뭐여  성질 머리 하고는.'

“한우 전문점으로 가요.” 성길씨가 말했다.

‘내가 졌소.’ “그래 갑시다, 가.” 나는 얼른 대답했다.

이 식당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내가 먼저 식당에 올라갔다. 손님이 막 일어서는 테이블이 딱 한자리가 있었다. 나는 내려가 자리가 있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내 눈앞으로 흰 뭉치가 공중에 뜬 채 쌩 지나갔다.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이층 계단을 축지법이라도 쓴 듯 단숨에 올라가 버렸다. 뒤따라가다 그 모습을 본 성길 씨는 나를 향해 “봤죠?” 물론 나도 깜짝 놀랐다.


성길씨는 등심 2인분, 안심 2인분, 소주 1병, 맥주 한 병을 시켰다. 할머니 식사량이 대단했다. 성길 씨는 그런 할머니를 보고 말했다.

“우리 엄마 백 살까지 사시겠죠?”

“아니요, 이 백 살까지요”

우리 셋은 웃었다. 나는 맥주잔에 소주를 반 잔 부어 폭탄주를 만들었다. 젓가락으로 휘릭 저었다. 성길씨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즐거워하며 고개를 맘껏 젖히고 술잔을 마구 비웠다. 그는 소주 1병을 또 시켰다. 나는 빨간 뚜껑 ‘해병대 소주’로 다시 주문했다. 우리는 소주병을 연타로 자빠트렸다. 나는 머리가 팽 돌았다.  

“아따 집에 가야 쓰겄소.”

거나하게 취한 성길씨가 말했다.

“근처 단골 노래방에서 놀다 가요.”

“예? 그냥 집에 가요. 할머니도 피곤하실 텐디.”

나는 노래방 가자는 말에 귀가 바짝 열렸지만,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 저러는데 ‘아니 되옵니다’ 연신 외칠 수가 없었다.

실은 나도 노래를 하고 싶었다. 망초대가 올라오자 내 곁에 없는 페키니즈  산이가 생각이 났다. 산에서 산이란 놀다가 망초꽃을 꺾어 집으로 오곤 했었다. 산이가 망초 속에서 놀다가 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 가요.” 곧바로 성길씨에게 할머니를 설득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기어이 노모를 달래어 노래방을 갔다. 큰 도로에 있는 ‘월드컵 노래방’은 그의 이십 년 단골이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장가갔어요?”하고 여주인은 뛰어나오면서 물었다. 성길씨는 노래 한 시간과 소주 한 병, 보리차 물을 시켰다.     

“내가 노래방을 엄청 다녔죠. 주인이 여자도 소개해줬었죠” 나는 그가 집에서 오직 할머니 오줌 이불빨래와 밥을 하면서 엄마 노인학교 마중과 배웅만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었다. 성길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단골이었을 때 돈을 팍팍 쓰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첫빳다로 ‘꽃바람 여인’을 눌렀다. 그는 자막을 보지도 않고 불렀다. 아마 18번인 것 같다. ‘어쩌, 나를 두고 한 것 같기도 하고 거시기 허네’ 나는 할머니를 위해서 ‘여자의 일생’을 불렀다. 누워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손바닥을 쳤다. 나는 눈이 안 좋아 노래 찾는데 3분 넘게 걸렸다.

“노래 찾다 날 새게 생겼네” 성길씨가 도우미를 부르고 난 뒤 과거 이야기를 했다.

“도우미랑 다음 날 돈을 주기로 하고 만났는데 화장발과 조명발이었어요.”

축구공만 한 싸이키 조명이 돌아가는 불빛 아래서 몽롱해졌을 때 보았다가 낮에 맨 정신으로 보니 한마디로 깬 것이다.

“뭐든지 욕심부리면 주름이 생기기거든요. 옆집도 주름이 없어요.”

“맞어요. 성형외과 갈 필요가 없어요. 돈 벌었지요.”

나는 18번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내 노래를 듣던 도우미가 말했다.

“노래 교실 다녀요?”

“아뇨, 타고났어요.”

성길씨는 내가 노래 부를 때마다 담배를 피우러 갔다. 술과 밥을 얻어먹었으니 내 딴에는 노래로 보답을 하고 싶었다. 거기다가 ‘노래 잘하는데요’란 말도 듣고 싶었다. ‘하여튼 눈치가 없단께.’

그는 나갔다가 들어오더니만, 핫도그 세 개를 사 왔다. 그는 족발을 시키자고 했다. 그리고는

‘꽃바람 여인’ ‘아파트’ ‘건배’ ‘고래사냥’ ‘한오백년’을 메들리로 눌러달라고 도우미에게 말했다. 내 귀에는 꽃바람 여인과 아파트에 살면서 고래를 잡아다가 건배하고 한 오백 년을 살아보자로 들렸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마이크를 잡고, 가운데 손가락을 밖으로 뻗은 채 나머지 두 손가락은 마이크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꽃바람 여인’을 불렀다. 나는 ‘꽃바람 여인 닳아져 불 것소’ 중얼거렸다. 저 노래만 세 번 불렀다. 그도 한때는 노래방에 돈을 날렸다는 것을 알았다. 마이크 잡는 폼이 그만의 기본자세 같았다. 이 모습을 본 도우미가 말했다.

“노래방에 돈 많이 갖다 바친 것 같아요.”

성길씨는 그 말을 듣자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좋아했다.

“내가 왕년에 좀 썼지.”

그는 나와 도우미 앞에서 가오를 잡았다. 나는 아파트 노래 전주곡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가 나자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성길씨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스텝을 밟았다. 그 옛날 노래방에 미쳤던 버릇이 나왔다. 노래방  기계를 사다 집에 놓을 생각도 했었다.  노래는 관중이 필요하다.  혼자 노래하면 달도 쓰도 않는  참외 같다. 노래하고 술 마시고 춤을 추다가 결국은 성대 결절 수술을 했다.  쾌락은 질병의 이자였다.

그때는 그랬고, 즈음은 아니다. 금 사는 집에 친구가 나 심심하다고 노래방기계 설치 해줬다. 혼자 노래하다 마이크 집어 던졌다. 손님 올 때나 한 번씩 몸을 푼다.

나는 테이블에 발을 올리려다 순간 멈추었다. 대신 생수병에 동전을 넣고 벽을 쳤다. 도우미도 탬버린을 머리 어깨 무릎 배 팔꿈치 발바닥으로 현란하게 옮겨 다니면서 ‘앗싸’를 외쳤다.  우리는 한이라도 풀듯 직진했다. 성길씨는 삘을 받았는지 갈지자와 다이아몬드 스텝을 번갈아 밟았다. 그의 발재간이 경이로웠다. 그의 새로운 습을 본 것이다. 농사 잘 짓지, 김장 잘하지, 열무 얼갈이 눈 깜짝할 사이 무쳐 버리지, 거기다가 춤까지. 왕년에 한 가닥 안 한 사람 어디 있을까만 그래도 성길씨 ‘이렇게 사람 놀라 자빠지게 하는 것 아니지’ 그는 노래를 끝내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돌아오지 않는 강’ 눌러주세요.”

“조용필 노래요?”

깜짝 놀라 내가 말했다. 내가 옛날에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예.”

‘아, 이 능구렁이가 나한테 블루스라도 치자고 하는 것 아니여, 올 것이 왔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랑 부르려고요.”

나와 도우미는 졸도할 뻔했다. 누워있던 할머니는 일어나 앉았다. 마이크를 꼭 쥐었다. 할머니는 자막을 읽어 내려가며 부끄러워하면서도 술술 불렀다. ‘아까 노래방 안 가겠다고 한 할머니 맞어?’ 아들은 엄마와 눈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다. 성길씨 말을 빌리자면 “울 엄마 노래방 와서 도우미에게 10만 원 팁도 준 적도 있어요” 했다.

성길 씨는 점점 취해가고 나는 술이 깼다. 노래 한 시간 더 하자면 아쉬워하는 성길씨를 달래어 파장하였다. 노래를 연장하면 내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 성길씨가 있는 친구, 없는 친구 다 불러 날마다 노래방 가자고 할 것 같았다.


노모가 아까 밥 먹다가 말했었다. 강원도 살 때 처녀 적에 가나원에서 활동하다가 CIS 인지  가나원 인지에서 잡으러 오기도 했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잡혀 고문을 당해 기절을 세 번이나 했단다. 내가 이사 오던 해 노모가 젊었을 때는 조용기 목사와 신방을 다녔다는 말을 성길 씨가 했었다. 지금 보니 노모는 점잖고 어딘가 모르게 기품이 있어 보였다. 어떻게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성길 씨 아버지와 결혼을 해 자식을 낳고 살았는지 새삼스레 궁금했다.

그나저나 성길씨가 오늘 쓴 돈이 줄잡아 30만 원은 될 것 같다. 내가 돈 많이 쓴다고 하도 걱정을 하자 여동생들이 어버이날인데 못 와서 부쳐준 돈이라고 걱정 마라 했다. 그는 옆집인 내가 안 왔으면 이렇게 놀 수 없었다고 오히려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 그는 술 마시면 아낌없이 돈을 쓰는 타입 같았다.

     

다음날 성길씨는 방에서, 열무는 다라이에 절여져 완전히 뻗어 버렸다. 노래방에서 술을 막 마시더라. 노모랑 나랑 서서 다라이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으면 허겄구만, 나는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재주밖에 없어서, 우렁각시는커녕 나는 따개비 각시도 못되니.’

어버이날 전야제를 거하게 치른 성길 씨는 해가 뒤로 넘어간 뒤 일어났다. 그는 김치 담는다고 메뚜기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오늘이 아들의 날인지 나도 헷갈렸지만.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내가 밥을 차려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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