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아로니아 꽃이 피었다. 아로니아 꽃이 피면 면 하남시 개발저지 집회 참석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날 조카결혼식인데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간편한 옷을 입고 샘재 사거리 향교로 갔다. 사람들이 엄청 모여있었다. 천여 명은 넘을 듯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사 가기 싫어 매일 술 마시는 성길씨는 코빼기도 안보였다.
사람들은 오는 대로 구호가 적힌 머리띠나 어깨에 걸 수 있는 띠를 종이박스 안에서 골랐다.
“한 맺힌 생존권 보장’
‘개가 웃는다! 주택정책’
‘조상 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하남시장 대답해라!’
구호들은 사뭇 격렬하고 비장했다. 나는 ‘닭대가리 국토부 장관 물러가라’ 피켓을 집어 들었다가 다른 구호로 바꿔 멨다. 문구가 너무 과해 나의 소심함이었다. 얼른 띠를 어깨에 걸치고 사람들 틈에 앉았다.
동네 아줌마들이 꽹과리와 북을 쳤다. 나는 북소리를 듣자 가슴이 움찔거리면서 속에 불이 확 치받아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욕이 절로 나왔다. “왜 주민들이 원하지 않는 아파트를 짓는다고 난리인지. 서울 사람들을 위해서?” 흥분한 사람들이 옆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가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하남시민이 호구냐?’ 단상 가까이에 서 있는 아저씨의 플래카드가 나를 웃게 했다. 나는 아저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줬다. ‘징그러울 만큼 많은 시멘트 박스들, 구멍 하나가 수억씩 한다는 그 무생물의 끔찍한 풍경을 나는 모래주머니라고 한다.
그래서 저 아저씨는 “개발이고 돈이고 다 소용없어! 누가 여기에다 아파트 지어 달래! 여기는 우리 선산이라고!” 격렬하게 외쳤다.
집회에 모인 주민들은 식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회자가 진행 시작을 알렸다. 여자가수가 ‘산 자여 따르라’를 불렀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향해 흔들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우리 마을에 거의 매일 오는 사진작가 이필호 씨였다. 나는 동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 시위 현장에 왔다. “월세로 살면서 여기 왜 왔느냐”는 말을 시청 앞 집회 때 들어서였다. 나는 그때 “여기서 오래 살고 싶어서”라고 대답을 했었다.
‘여기서 살고 싶어서’라는 말은 정말 내겐 절실한 고백이었다. 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사진작가는 나의 모습을 찍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소심하게 손을 흔들고 박수도 쳤다.
다음 차례는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동네 유지들의 삭발식이 이어졌다. 북과 꽹과리 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삭발하는 것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사람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식이 거의 끝날 때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한 상여 앞으로 집행위원들이 모여들었다. 술을 따르고 한 사람씩 차례로 절을 했다. 그들의 결연한 몸짓이 크게만 보였다.
사회자가 주민들을 향해 외쳤다. “저도 여기가 고향입니다. 그린벨트로 묶어 놓고 오십 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못 하게 했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상여를 매고 춘궁동 동사무소 한 바퀴 돌고 나와서 시청으로 행진하겠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치는 사람 없어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행진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사내들이 상여를 둘러맸다. 구호가 적힌 깃발이 앞장섰다. 꽹과리와 북이 그 뒤를 따랐다.
상여를 따라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대형버스를 앞세운 경찰들이 이미 도로에 차로 벽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죽을죄라도 지었냐?”
이렇게라도 안 하면 잠도 못 자고 죽을 것 같아 주민들이 울분을 쏟아놓는 것인데, 저 많은 경찰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들리듯 말 듯 욕을 했다. 주민들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아파트는 들어설 거고, 정부를 이기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다 곧 죽을 숭어 같았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기가 막힌 것이다. 자신들을 아무렇게나 취급한 자들에게 분노한 것이다. 주민들은 기꺼이 밟히면 꿈틀거리는 지렁이되고자 했다.하지만 밟히면 죽는 것도 알고 있었다.
향교에서 벗어나 샘재 사거리로 향했다. 뒤따라가는 사람들 대부분 60대부터 80대였다. 나는 그게 더 가슴 아팠다. 사람들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보고 웅성거렸다. 한마디로 기가 죽은 것 같았다. 갑자기 앞이 시끄러웠다. 경찰들이 길을 막았다.
“우리는 평화 행진을 할 것이니까 길을 터 주세요” 진두지휘를 하던 한 사람이 핸드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앞사람들이 뒤로 밀렸다. 시위대열이 휘청했다. 아수라장 직전이었다. 뒤로 밀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힘을 모아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밀면서 나갔다. 나는 힘을 줘 앞사람 등을 밀었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일까? 순식간에 상여 옆에 서 있는 경찰들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방패들을 밀었다. 깃발을 달았던 대나무가 보였다. 누군가 대나무를 휘둘렀다. 아차 이러다가 누군가 다치겠구나. 그렇다고 대열에서 나올 수는 없었다. 그때는 한 치도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눈앞을 막아선 어린 조카 같은 경찰들이 아니라, 그 경찰들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아수라장을 내려다보고 있을 눈들을 향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발뒤꿈치에 아무리 힘을 주고 버텨도 점차 밀렸다. 내가 이런 지경인데 노인들은 오죽할까. 기어이 비명 같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니놈들은 애미, 애비가 이 동네에 살고 있어도 길을 막을 수 있느냐!” 할머니가 소리쳤다.
할머니 외치는 소리에 오래전 그 일이 떠올랐다.
이십 대 후반, 나는 오빠가 운영하는 직장 대전에서 전주로 발령이 났었다. 학원 자유화 시위에 앞장섰던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들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학생들이 그 일로 격렬한 데모에 나섰다. 난 사무실에서 나와 학생들을 응원하기 위해 인도에서 박수를 치며 지켜보고 있었다. 경찰들이 곤봉을 들고 시위대 학생들을 쫓아갔다. 나는 소리쳤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냐!”
곁에서 무전기를 들고 지위하던 경찰 간부가 한마디 던졌다
“우리 새끼들도 머리가 깨졌어요!”
경찰 간부의 말은 오랫동안 나를 헷갈리게 했다. 누가 내 편이고 네 편이란 말인가. 누가 편을 나누어 놓았나. 왜 편만 나뉘면 서로에게 분노해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막고 있는 경찰들은 과연 우리의 적일까? 생각하다가 다시 앞사람 등을 밀기 시작했다.
쓰러진 할머니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우리는 울기 시작했다. 몇몇 어른들이 밀려서 넘어졌다. 깃발을 들었던 청년들이 눈이 뒤집혀 앞으로 뛰쳐나가 경찰들을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넘어진 어르신들이 밟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50대 아줌마들이 그 주위를 에워쌌다. 일어난 어른들은 대열 밖으로 나가시라 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우리는 평화 행진을 할 예정이니 그대로 우리를 보내주시오! 만약에 주민 한 명이라도 다치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핸드마이크를 든 사람이 경찰들에게 말했다.
사내들은 깃발을 다시 들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깃발은 그들 손에서 힘차게 펄럭였다. 북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 머리가 벗어진 50대 중반 아저씨가 대열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긴장했다.
아저씨는 구호가 적힌 띠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하남시민 70 프로가 아파트를 원했다는데 우리한테 언제 물어봤냐고!” 우리는 “아니요!” 합창했다. 아저씨는 머리에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구호가 적힌 띠를 매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햇빛에 그의 머리가 빛이 났다. 아줌마 한 분이 그에게 생수를 갖다 주었다.
격렬한 시위 끝에 결국 경찰 대장과 마을 대책위원장이 협상을 시작했다. 경찰은 도로 가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우리는 질서 정연하게 걸어 동사무소를 한 바퀴 돌고 나왔다. 우리는 춘궁동 동사무소 마당에서 노제를 치르고 나왔다.
노제를 끝내고 나오자 비가 온 것도 아닌데 남한산성 북문 위로 큰 무지개가 떠 있었다.
“와 무지개다!”
우리는 모두 서서 외쳤다.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대열밖에 서 있던 사람, 지나가던 사람, 어른, 청년, 경찰 할 것 없이 모두 고개를 들고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시위대도 경찰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다. 전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경찰들의 뒷모습과 무지개를 같이 찍었다. 핸드폰을 바꾸면서 사진이 없어져 버렸다.
“좋은 징조야!”
우리는 신도시 개발이 무산돼 마을에서 쫓겨가지 않을 거라면서 환호를 했다. 몇몇 경찰들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고 무지개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출발합시다!”
경찰과 주민들은 모두 긴장이 풀어진 모습으로 함께 발을 맞추어 시청으로 향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무지개를 쳐다봤을 뿐인데, 더는 서로를 밀어붙일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그랬다.
2
그날 나무그림자가 길게 드러누운 저녁쯤이었다. 밭에서 나와 방으로 들어가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교복을 입은 머리가 짧은 여학생이 두리번거렸다. 누굴 찾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자기를 보고 있나 살피는 느낌이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쪽 발을 집안에 들여놓고 그 학생을 지켜보았다. 마을에서 처음 보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나를 못 본 거 같았다.
우리 집 맞은편 공터에 풀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거졌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서 있는 그 빈터 철조망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고 싶다’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낙엽을 태우면 백만 원 벌금’ 이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는 하남 교산 3기 신도시 <개발 반대 대책위원회>에서 걸어놓았다. ‘낙엽을 태우면 백만 원 벌금’은 하남시에서 걸어 놓은 것이다. 이념과 처지가 다르면 이렇게 서로 다른 말을 하는가. 공터가 참 어렵다.
어둠 속에서 여학생은 빠른 손놀림으로 대책위원회에 플래카드를 풀고 있었다. 그러나 맘같이 끈이 쉬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학생! 왜 플랑카드를 뜯을라고 해요? 일부러 걸어놓은 건디?, 나중에 일이 해결되먼 그때 떼요.”
나는 높이던 소리를 점점 낮추어 가며 말했다. 내 목소리에 놀란 듯 학생은 어쩔 줄 몰라했다. 학생은 그대로 멈추고 다람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마을 위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목소리를 낮춘 이유가 있다. 혹시 나중에 내가 사는 집에 학생이 돌이라도 던질까였고, 한편으로는 학생이 얼마나 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으면 저러나 싶어서였다.
어린 여학생과 어른들은 서로 생각이 달랐다. 플래카드만 떼버리면 곧 이사 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는 그 여학생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마을에서 나가기 싫어 조카결혼식도 안 가고 집회에 갔다. 그 여학생은 단단히 묶여있는 플래카드처럼 이 마을에서 지내는 것이 지겨워 저것을 떼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플래카드는 하남시 입구에서 남한산성 밑 고골까지 근 5Km에 이르는 길 양쪽에 숲을 이루었다가 철거되기를 반복했다. 협상의 추이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면서 찬성과 반대의 희망 고문을 계속해 왔다. 그 눈에 보이는 증거가 바로 플래카드였다.
여학생이 뜯고 싶었던 플래카드는 어느 날 사라졌다. 그 자리에 “지장물 조사 반대”가 나붙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LH에 유리하게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 여학생의 바람대로 개발 계획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나이든 토박이들과 고골 (법화골)에서 나고 자란 여학생과는 생각이 달랐다. 이 생각은 조정하고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플래카드의 한쪽에는 할머니가, 다른 한쪽에는 그녀의 손녀인 여학생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