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은 내겐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눈이 쌓이는 겨울밤에 난로 옆에서 스웨터를 입고 서성거리면 멋스럽게 보일 것 같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명치끝을 쑤시던 순간도 있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여운에 나는 저절로 방바닥에 앉아 멍을 때린다.
나는 명상음악이나 해금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다. 요즈음 클래식 채널을 틀어놓고 들어보려고 노력 중이다. 산책할 때만큼 집중력이 생긴 다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피아니스트 서형민은 미국 사는 고향 친구 양순이 아들이다. 베토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국내에서 그의 연주회가 있을 때 현장에서 그가 연주하는 것을 몇 번 보긴 했다. 집에서 듣는 것과 현장에서 듣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여전히 내겐 그 서양음악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 똘똘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양순이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하면서 아들 뒷바라지를 했다. 나에겐 피아니스트로 국제적 명성을 지닌 아들보다 엄마인 양순이가 더 자랑스럽다. 그녀와 6시간의 긴 통화를 했다. 그동안의 고생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울었다.
그동안 다양한 사람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녀의 삶이 그대로 밀착영화였다. 어쩜 그래서 영화를 인생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자취를 언젠가 글이나 영화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서형민 단독 연주회가 있었다. 양순이는 본인이 서울에 갈 수가 없으니 나보다 가라고 했다. 친구 딸 도은이랑 둘이 콘서트장에 가게 됐다.
그날 서울에 천둥 번개와 소나기가 엄청 쏟아졌다. 우리는 꽃 살 생각을 아예 못 했다. 무사히 평창에만 도착해야겠다고 생각해 빈손으로 출발했다. 섬세한 성격의 도은이는 대관령 도착할 때까지 꽃다발 걱정을 했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는 양순이 지인이 잡아준 호텔에서 묵었다.
연주회가 있는 당일 날 아침 도은이는 꽃다발 걱정을 태산처럼 했다. 나는 “무슨 수가 있겄지” 도은이를 안심시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은근히 걱정됐다. 도은이는 걱정하지 말만 하는 내게 ‘이모 빈손으로 간다는 게 그렇지 않아!’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누구냐 잔머리 대가 아니냐.’
콘서트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도은이에게 먼저 콘서트홀로 가라고 하였다. 나는 콘서트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내 예상은 빗나갔다. 들꽃이 보이지 않았다. 콘서트홀 뒤로 돌아갔다. ‘아 살았다’ 들꽃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꽃을 한 움큼 꺾어 들고 콘서트홀로 갔다. 도은이는 물론 입구에 서 있던 형민이 팬들도 엄지를 치켜세웠다. 누군가 한 명이 노란 고무줄을 가져왔다. 꽃 아래를 묶었다. 나는 종이를 구해와 꽃 아래를 싸 감았다. 들꽃은 그 어느 꽃다발보다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