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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거기 내가 서 있었다 186

by 불량품들의 사계

거기 내가 서 있었다



점심때 오랜만에 석촌호수에 나갔다. 벚나무엔 파랗게 잎이 돋았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을 걸었다. 정신없었다. 반도 못 걷다가 집으로 왔다.

얼마 전 뿌린 바질 싹이 돋았는지 밭을 들여다보았다. 언덕 위에 살구꽃이 내려와 어깨에 앉았다. 꽃을 어깨에 얹고 밭고랑 사이를 걸었다. 앞산 나무들은 소리 없이 옷을 입었다. 나무들은 저리도 달싹거리는데, 나는 밥맛을 잃어버렸다.

눈 내리는 날 방구석에 앉아 봄부터 뭐든지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막상 혼자 하려 하니 딱히 할 것이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르겠다. 그 좋아하던 산도 몇 번이나 갔을까. 무언가 투명한 막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운전대를 잡았다. 팔당대교를 넘어갔다. 강물 위에 햇빛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하지만 왠지 나완 아무 상관도 없는 앞으로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그 무엇도 가로막는 것이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단절감이 마음을 더 울적하게 했다.

오늘은 허공을 가르는 새들에게 맨살을 내어주고 싶다. 눈물을 흘리든지 피를 흘리든 세상의 실감이 좀 느껴졌으면 싶다. 팔당댐을 지나 강을 따라가는 나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나는 속도를 무서워한다. 속도계가 140Km를 넘는 데도 오늘은 별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중력의 투명한 물방울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쫓겨 이사 가야 한다는 압박감 탓인지 눈앞의 모든 것들에 실감을 느낄 수 없다. 검게 번들거리는 나무에서 벚꽃이 하릴없이 떨어졌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꽃잎은 속절없이 흩어졌다.

두 달 된 보더콜리 강아지 ‘타잔’이 있는 양평 신애리에 도착했다. 금희 집 마당에 들어서자 타잔보다 밭에 가득 핀 냉이꽃이 나를 반겼다. 담 아래는 두릅이 움을 틔우고 있었다. 냉이 꽃이 나를 쳐다본다. 내 바지 스치는 소리에 놀라는 듯한 냉이 꽃을 들여다보는데 울컥 목이 메어 왔다. 아무 까닭도 없는 눈물이라니.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아무 실감이 나지 않던 무채색의 세상이 갑자기 제 빛깔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세상도 나도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는데 왜 아무 실감도 나지 않았을까.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한순간에 나 안에 가득 차올랐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 자신이었다. 혼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풀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내 뺨을 벚꽃 몇 장이 스치고 갔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벚꽃이 알 턱이 없지만 찬란한 햇살 아래 꼭 거기, 나의 앞뒤에서 빛과 그늘이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벚꽃에 뺨을 베인 나는 처음으로 내 눈물의 이유를 끝까지 알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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