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 같은 담뱃불 198
알약 같은 담뱃불
저녁 무렵에야 비가 그쳤다. 여자 넷이 문 앞으로 걸어왔다. 분위기가 싸했다. 한 명 빼고 처음 본 여자들이었다. 머리를 묶은 여자가 집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듣던 거보다 더 예쁘게 꾸몄네요.”
“아, 예.”
나는 공손하게 대답을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텃밭 가 아침 달맞이꽃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길씨는 수돗가에 서서 불도 붙지 않은 담배를 물었다 뱉었다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성길씨 여동생들이었다.
‘어째 분위기가.’
파마가 다 풀린 동생이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물었다.
“옆집이 써줬어요?”
“뭘요?”
“앞으로 우리 오빠가 뭐 써달라고 하면 써 주지 마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긴장한 나머지 곧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나한테 뭐 하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톤이 올라갔다. 쫄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며칠 전 성길씨가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며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나는 사실을 썼지만, 이 살 저 살 살을 붙여 썼다. 구구절절 여기다 다 쓸 수 없고 내용은 이러했다.
‘지금껏 성길씨가 노모 똥오줌 빨래하고 그것을 반증하는 것은 빨랫줄에 이불이 자주 널려있고, 기저귀기가 수시로 주인집 앞에 배달되었다. 아저씨는 외출했다가 할머니가 노인학교에서 오시기 전 미리 와서 마중하고, 외박 한 번 한 적 없다.’ 라고 썼다.
성길씨 말에 의하면 LH에서 노모 앞으로 나온 보상금이 있는데 노모의 후견인을 여동생들이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여동생들과 재판이 붙었다. 그러면 성길씨는 엄마의 돈을 쓸 때마다 여동생들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써야 하고 영수증을 모아야 했다.
성길씨는 여동생들과 하루에 수십 통 전화로 돌아가면서 싸웠다. 성길씨는 말발로 안되면 술을 마시고 24시간 그녀들에게 전화했다. 술이 깨면 마시고 전화를 잡았다.
나를 보아도 하소연했다. “여동생들이 김장할 때 돈을 보내준 적 있어 생활비를 보낸 적 준 적 있어 엄마를 모시느라 나는 결혼도 못 하고, 어떤 여자들이 시누이가 네 명이나 있는데 시집을 오겠어요. 갑자기 후견인 자처하고 나서니 내가 억울하지 않겠어요.”
몇 날 며칠 같은 말을 나는 마당에서 쪼그리고 앉아 들었다.
잠시 후 키가 작고 청바지를 입은 동생이 내 콧잔등까지 다가와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우리 오빠가 또 써달라고 해도 써 주지 마세요.”
‘써줄 것인디.’
나는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다. 쪽수에 밀려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내가 써준 글 때문에 그녀들이 불리해진 것 같았다. ‘또 써주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라는 공포를 느꼈다. 그녀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 성길씨 옆으로 가 말했다.
“어떻게 동생들이 나한테 뭐라고 헐 때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앞으로는 나헌테 부탁 허지 마세요.”
“도옹새엥드을한테 마알로는 모옷해에봐요.”
그는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다. 요새 더듬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를 만만허게 보고 여동생들이 재판 걸고 저 옆차기 허지요.”
나는 화를 내면서 집으로 왔다. 순둥이가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야, 너도 니네 아빠헌테 가.”
며칠이 지났다. 해 질 녘 마당 가 베고니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성길씨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걸어왔다.
“성엉나암지이원에서 어어머니랑 도옹새앵들이랑 버업정에에서 마난기로 해앴느은데 그으날 데에려어다아 주울 수 이있어요?”
“생각 볼께요.”
화가 가라앉아 대답했지만, 겁이 났다. 체질적 오지랖이 남의 일에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여동생들이 또 몰려와 몰아붙이면 동네 창피해 깨깽 할 게 뻔한데, 밤새 갈까 말까 고민하다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물을 마시고 전화했다.
“그날 약속이 생겨 못 가겄어요”
“예.”
전화기 너머 성길씨는 내가 안 갈 거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같았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당일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친구들과 어슬렁거렸다. 시간을 죽이다 성길씨 와 마주치지 않으려 열한 시 지나 출발했다.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걸었다.
마당에 알약 같은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밭 가운데 막사 뒤로 돌아갈까 생각하다 마당 입구까지 와버렸다. 성길씨는 술에 취해 파란색 플라스틱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파란 테이블 위에는 술 취한 소주병들이 누워있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내가 언제부터 체면과 유불리를 따졌다고 대담한 줄 알았는데 새가슴이었다. 데려다줄 걸 후회하면서 수돗가에 앉았다.
“잘 갔다 왔어요? 약속만 없었으먼.”
“괜찮아요.”
그는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한잔 하실래요?”
“아니요.”
“실은 내가 보상금을 동생들 안 주고 나 혼자 독차지하려다 동생들이 열받아 재판 걸었어요."
“뭐라고요? 여동생들이 아저씨가 받은 보상금도 더 달라고 허고 엄마 후견인까지 헌다고 해 재판을 걸었다면서요.”
“여어집에 내에가 거어짓마알한 거어예요.”
“옴매, 환장 허겠네. 나는 그동안 아저씨 안타까워서 여동생들 욕 허고, 글도 써주고 했는디.
“내에가 요옥심 부우려 이이사단안 나안거어예요.”
”어쩌까 참말로, 글고 동생들이 몇억이 넘는 돈을 그냥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줄 알먼서 그래도 그렇지, 아저씨는 여행 한 번 못 가고 똥강아지처럼 동네만 뱅뱅 돌아만 댕기고(성길씨 눈을 바라보았다) 여자를 만나기를 해, 뭐를 해’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일어나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소주잔을 내밀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김치와 소주병을 들고 나왔다. 설마, 날 새는 것은 아니겠지.